하루에 가방 두번 ‘깜빡’…“괜찮아, 찾을 수 있을 거야”

한겨레 2024. 7. 2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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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후배 부부와 떠난 외국여행
40대 후배 부부, 고마운 제안
느리고 여유 있게 홋카이도로
부인 실수에 ‘네 탓’ 안한 남편
‘내 기준’ 강요하지 않는 성숙함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미국에서 공부하던 30대 때, 저는 여름방학이 되면 자동차 지붕에 캠핑도구를 잔뜩 싣고 아이들과 함께 국립공원을 다녔습니다. 그중에서도 옐로스톤은 참 특별했습니다. 한달 전부터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출간한 국립공원 안내 책자를 사서 어느 길로 가서 어디에서 캠핑을 할지, 어디를 가볼지를 꼼꼼하게 선정하고 계획을 짰습니다. 동서남북 네 군데 캠프사이트를 정해서 일주일 동안 매일 한 군데씩 옮겨 다녔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릅니다. 좀 느리게 여유 있게 움직여야 즐겁습니다.

‘어떤 일에도 불평하지 말자’

5년 만에 외국여행을 갔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외국여행은 엄두를 못 냈습니다. 패키지 여행은 짜인 일정대로 함께 움직이는 게 부담스러웠고, 혼자 여행을 즐기는 나이는 이미 지났습니다. 더구나 최근엔 무릎 관절염 때문에 오래 걷는 건 조심스럽기도 했고요.

그러던 차에 오랫동안 친구로 가깝게 지내온 젊은 후배 부부가 몇달 전부터 함께 외국여행을 다녀오자고 권했습니다. 결혼 20년차인 후배 부부는 여전히 잉꼬부부에, 적극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40대 후반입니다. 고마웠지만 망설여졌습니다. 외국에 나간 지도 오래됐거니와, 노인이 돼서 그런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놓인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일정 계획을 짜고, 숙소와 방문지를 예약하고, 공항을 오가며 출입국 과정을 거쳐야 하지요. 또 현지에서 거듭 이동해야 하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 걱정에 후배 부부는 자신들이 모두 다 할 테니 저는 그냥 공항에 나타나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선호하는 바를 알려달라더군요. 저는 두가지를 말했습니다. ‘너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거리 비행은 좀 힘들 것 같다’. 그랬더니 일본 홋카이도를 제안하더군요. 설국으로만 알고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지요. 홋카이도의 여름은 라벤더가 아름답다는 말에 솔깃했습니다.

여행 장소는 두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후배가 며칠 뒤 보내온 5박6일 임시 일정을 보고 조금 아득해졌습니다. 매일 호텔을 옮겨야 하는, 의욕이 가득 찬 계획이었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매일 숙소를 옮기는 건 좀 힘들 것 같다, 조금 여유롭게 쉬면서 움직이면 좋겠다”고 의견을 전했습니다. 젊은 시절 매일 캠핑 장소를 바꿔가며 텐트를 옮겨가던 과거의 나는 온데간데없어 조금은 슬펐습니다. 다행히 후배 부부는 저를 배려해 여행 일정을 조정해줬습니다.

가족과 여행 가도 갈등이 생기기 쉬운데 후배들과 괜찮을지 조금 걱정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생각했습니다. ‘즐거운 여행을 위해서 어떤 경우에도 불평하지 말자.’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차를 달려 바닷가 도시 오타루를 지나 요이치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산자락과 터널 그리고 초원과 주변 초록빛 풍광은 참 평화롭고 아름다웠습니다. 멀리 파란 바다색과 대비되어 찬란한 햇살 아래 구릉지와 초원이 환상적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도미타농장의 라벤더도 참 멋졌습니다. 1930년대 유럽에서 들여와서 조성한 라벤더 밭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보랏빛, 그 꽃물결은 주변의 구릉지 그리고 멀리 아직 눈을 이고 있는 활화산을 배경으로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호텔에서 가까운 활화산 도카치산도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국립공원인 이 지역을 며칠씩 걷는 트레킹 코스도 있다지만 우리 일행은 등산로 입구에서 왕복 1시간 정도만 산행을 했습니다. 오래 걷는 게 힘든 저를 배려한 것이지요. 분화구에서 수증기와 가스가 올라오는 활화산은 기슭만 걸었을 뿐인데도 좋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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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랭한 기운도, 참는 기색도 없이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여행을 하다 보면 계획대로 일정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도 있고 크건 작건 불편함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떠나오기 전 마음먹었던 대로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불평하지 말자.’ 사실 이건 후배들에 대한 오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계획대로 안 됐을 때도 ‘이게 최선이야. 그러니까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젊은 후배들과 함께하는 건 정말 즐거운 일입니다. 그들의 풍성한 에너지와 열정 그리고 지혜가 나를 일깨우고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물론 전제는 내 욕구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 한계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걸 그들에게 알려주고 함께하면 나는 지나간 세월의 삶 속에서 건져 올린 몇가지를 그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늙으면서도 행복하고 또 성장하게 됩니다.

특히 후배 부부가 서로를 대하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읍내에 나가서 소바 점심을 먹고 나와서 근처 공원을 걷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갑자기 후배가 자기 손가방이 없다고 했습니다. 급히 차를 돌려서 식당으로 다시 갔는데 이미 문은 닫혔습니다. 문을 두드려 아직 퇴근하지 않은 주인을 만나 간신히 손가방을 찾았습니다. 그날 늦은 오후, 후배는 또 손가방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산 뒤 가게 밖에서 잠시 쉬었는데, 그때 가방을 놓고 온 모양이었습니다. 이미 한참 이동한 상황이었고, 해가 지려던 터라 좀 긴장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의 남편은 “다시 가면 가방을 찾을 수 있을 거야”라며 바로 차를 돌렸습니다. 다행히 가게 밖 벤치에 손가방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두번이나 손가방을 잃어버려 번거로운 걸음을 해야 했지만, 부부는 전혀 언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냉랭한 기운도, 참는 기색도 전혀 없었습니다. “너는 대체 왜 그래?” 하는 네 탓이 없었습니다. 일어난 일에 집중해서 해결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의 대화로 돌아갔습니다. 활달한 후배는 어깨에 걸치는 가방이 익숙지 않아서 내려놓고 잊어버린 모양이라고 눙칠 뿐이었습니다. 정말 성숙한 젊은 부부였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여행과 같은 인생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했던가. 내 기준, 내 호불호를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진 않았나. 상대방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했나. 그가 자신의 기준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던가.

7월 초의 홋카이도, 희끗희끗 눈자취를 이고 있는 활화산으로 둘러싸인 호수, 고원지대의 구릉지와 초원, 에메랄드빛 계곡과 폭포, 그 특별한 풍광 속에서 종종 아무 생각 없이 고요히 머무를 수 있었던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과 함께해야 그 자연이 살아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처럼 마음먹고 떠났던 홋카이도 여행도 같이 가자고 해준 후배 부부의 따스하고 섬세한 배려가 없었다면 그리 즐겁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함께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둘째 날 저녁을 함께한 홋카이도대학 교수 부부가 홋카이도 동쪽 끝 시레토코를 안내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이라고 합니다. 기대됩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한 뒤 삶의 방향을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로 바꿨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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