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츠, 릴스의 시대에 '고전 문학'의 쾌락을 외치다…<금빛 종소리> 따라 길을 잃는 법 [책GPT]
한국 로맨스 영화의 대표작 <클래식>의 여주인공 지혜 (손예진 역)가 엄마의 옛 러브레터를 소리내 읽다 귀엽다는 듯 내뱉는 말을 기억하시나요.
-영화 <클래식>중
'클래식', 우리말로는 고전. 촌스러움이야 가까스로 면하더라도 세련됨과도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단어는 어딘가 우리를 망설이게 합니다. 느릿느릿, 조금은 고리타분한. 거기에 '글월 문(文), 배울 학(學)'과 결합해 '고전 문학'이라면? 서재 구석에 먼지 쌓여있을 듯한 옛날 책들은 그 출간 시점만큼이나 심적 거리도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수십, 수백 년을 걸쳐 안목있는 분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작품들인데….겨우 용기내 펼쳤다 눈만 감겨올 때도 감히 이 거장의 필력을 탓하기란 주제넘는 듯해, 대신 부족한 제 교양을 질책하는 쉬운 길로 도망가며 결론내립니다. '난 고전은 잘 몰라.' 혹여 마음에 드는 편을 발견했대도 요즘 취미를 묻는 질문에 한 넷플릭스 드라마에 빠져있다고 답하긴 어렵지 않은데 '제인 에어'라던가 '달과 6펜스'를 읽고 있다고 밝히긴 어쩐지 낯간지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듯도 합니다. 하지만 아시나요? 2024년 현재 K-팝 시장의 대세 아이콘인 걸그룹 뉴진스의 뮤직비디오 속 멤버 '민지' 역시 1870년대 미국 뉴욕 상류층의 이야기를 담은 고전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단언컨대 뉴진스만큼 힙한 신간, 김하나 작가의 고전읽기 안내서 <금빛 종소리>는 세간의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며 파격 선언합니다. '심심할 땐 고전이나 읽어봐라', '드러누워 몇 장 보다 베고 자라'고. 그러다 깨어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계속 읽고, 아무리 읽어도 지루하면 그건 당신을 위한 책이 아니니 내려놓고 다른 책을 찾아나서면 된다고. 재미거리를 찾는 어린 아이들처럼 완독이나 교훈에의 강박 없이 나와의 '케미(Chemistry)‘, 서로 공명하는 즐거움이 있는지 자유로이 알아보라는 조언은 책장을 넘기는 손짓은 가볍고, 마음은 부풀게 합니다. 생각해보면 <클래식> 속 몰래 훔쳐보는 어머니의 옛 러브레터도 오래된 서간문,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고전 문학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용된 고전 소설은 총 5편,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그리고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입니다. 저자는 고전의 세계에 입문하려는 용감한 독자들에게 이 5편의 매력을 도구삼아 어떤 마음으로, 어떤 부분에 멈춰서 보면 좋은지 다정하게 제안하고 응원합니다.
먼저 제안하는 건 ’100페이지의 법칙‘, 한 소설의 세계관에 제대로 몰입하기 위한 최소 분량입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책을 읽기 위한 시간을 낼 수 있는 하루를 정해두고, 스마트폰은 끕니다. 편한 자세로 재미없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말들을 잠시 인내하며 50장쯤 읽다보면 그것이 썩 마음에 들건 아니건 어느새 등장인물과 소설의 리듬에 동기화됩니다. 이런 과정을 한 번 거친 후엔 책장을 덮고 나서도 여러 날에 걸쳐 다시 그 세계에 접속하는 일이 한층 수월하다는 분석입니다.
감각, 감각, 감각의 소설 <아우라>편에서는 스페인어 동사 '디스푸르타르(disfrutar)’를 소개합니다. 과일을 뜻하는 '프루타(fruta)'를 내포한 이 단어는 '즐기다, 향유하다' 라는 의미인데, 저자는 이 표현에 고전을 즐기는 데에 필요한 정신이 집약돼 있다고 말합니다. 과일을 즐기듯 고전을 대해보라는 겁니다. 어떤 과일을 두고 우리는 과일의 계보에서 이 과일이 차지하는 위치나 영양소 성분에 대해 분석하며 먹지 않습니다. 대신 눈으로 열매의 빛깔을 보고, 코로 향기를 맡고, 입으로 깨물며 식감을 음미합니다. 고전 역시 작가과 세월의 흐름이 빚어낸 하나의 열매. 서사를 따라가며 교훈을 추출해내는 데에 급급하기보다 오감을 동원해 단어들의 리듬을 흥얼거리고, 인물의 한 마디에 오래 머무르며 쉬다 갈 때 그 참맛이 극대화되는 작품들이 있다는 설명입니다.
한 인간의 가치관 변화를 다룬 소설 <순수의 시대> 편에서는 '축척 변경의 기술'이 등장합니다. 슬쩍 들여다본 이야기 속 1800년대 '올드 뉴욕'의 상류사회는 현대 SNS에서 각자의 부유함을 뽐내며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리는 셀럽을 연상케 합니다. 여기에 그 모든 세태를 언팔로우하고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추는' 이혼녀 '엘렌'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허름한 동네의 작은 자신의 집에 남주인공 '뉴랜드'를 초대하고는 말합니다. "내 웃기는 집 어때요? 나한테는 천국이예요." 저자는 좁지만 취향이 가득 담긴, 그 이국적인 집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뉴랜드와 함께 좁은 줄도 몰랐던 시야가 광활하게 넓혀지는 해방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홍보합니다. 그 아찔한 축척 변경은 '망원경을 거꾸로 들여다 본 것 같은 감각', 혹은 '각성'일 것이라고도. 동시에 그간 가치 있다고 믿어온 모든 것들을 의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엘렌은 21세기 독자와 19세기의 뉴랜드 모두에게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인 셈입니다.
이름부터 멀게 느껴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편에서 김하나 작가는 저자 유르스나르의 속칭 'BL 오타쿠' (남성 간의 사랑이야기에 열광하는 부류) 같은 성향을 의심하며 과감하게 작품과 독자간 거리감을 좁힙니다. 그리고 이 고전이 '웹툰적인 캐릭터'를 그려낸 일종의 장르물이자 '고품격 자기계발서'라며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실제 회상록에는 오래된 주인공 황제(남성)가 왕위에 오르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뿐 아니라 미소년 '안티노우스'와의 꿈결 같은 사랑 그리고 이별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대로마제국의 황제로서의 거대한 고민뿐 아니라 '위대한 복원자' 잠의 소중함에 대한 고찰, 죽음과 잠의 유사성, 시간이 지날수록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나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의 고뇌 역시 생생히 담겨있다는 설명입니다.
"오너라, 짙은 밤아!" 함축적이고 강렬한 운문적 대사와 이미지로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맥베스>는 1600년대에 출간되고도 최근 '뉴스'에서도 자주 인용된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힙니다. 욕망하는 인간의 핏빛 광기, 그리고 파멸을 담은 이 이야기중 저자는 특히 후반부 '투모로우 스피치'에 대해 '통째로 수많은 생을 삼킨 것 같다'고 감탄합니다.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그림자가 걷는 것, 배우처럼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사라져 버리는 것,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은 건데 소음, 광기 가득하나 의미는 전혀 없다." 왕을 살해해 왕이 되고도 한평생 자신에게 죽임당한 이의 처지를 부러워하게 된 맥베스와 그 부인, 마침내 부인마저 잃게 되는 그가 인생에 대해 남기는 허무한 말은 '피트향 가득한 스코틀랜드산 위스키'처럼 쓰고 묵직한 향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내가 벌레가 되면 어떡할거야?" 부모님에게 묻고 그 반응을 공유하는 놀이가 한때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끌었죠. 이 장난스러운 놀이의 모티프는 소설<변신>. 자고나니 거대하고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평범한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입니다. 이 '웃픈' 상상의 세계에서 저자는 우리가 그 벌레의 구체적인 외양을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해보라고 제안합니다. 어떤 흉측함과 기괴함을 보여주면서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 문학의 매력. 다양한 기술을 동원해 그 글자들을 읽어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말입니다. 그건 배우와 대사, 배경 오브제 하나하나까지 정해진 모양새로 제공되는 영상 컨텐츠를 소비하는 일과는 분명 다른 '적극적 체험'이자 향유입니다. 그 결말로 향하는 여정에는 영화 <킹콩>, <프랑켄슈타인>를 인용하며 독자의 '벌레 되기'를 돕습니다.
- <금빛 종소리> 중
10초 남짓 뾰족한 요점의 '가성비' 숏폼 콘텐츠들이 범람하는 시대. 저자는 그 간편함을 잠시 등지고 옛날 책, 엉덩이를 붙인 채 직접 책장을 넘겨야만 하는 그 불친절하고 불가해한 세계에 기꺼이 발을 들이고자 하는 현대인들을 환대하며 말합니다. 장담하건대 그 용기는 당장이 아니더라도 남은 온 삶을 거쳐 두고두고 보상할 것이라고. 그건 같은 풍경, 행복 혹은 불행을 두고도 떠오르는 문장, 품게 되는 질문, 들려오는 조언들이 다양해지는 일일 것이고 '요점'의 세계로부터, 태생적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더 자유로워지는 길일 것입니다.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과 달리 억겁의 시간도 죽이지 못한 이야기 안에는 무엇이 살아있는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들이 남긴 어떤 글들이 어떻게 수백 년 후의 인간들을 가슴벅차 잠 못 이루고, 이 즐거움을 나만 알 순 없다고 호소하게 하는가. 호기심으로 가볍게 다가가 읽다 까무룩 잠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모처럼의 휴일, 오래된 유명 맛집을 찾아가듯 가볍고 산뜻한 마음으로 세계 문학이라는 새로운 도시를 산책해보는 여름도 꽤 낭만적일 것 같습니다.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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