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의 무게 [판결의 재구성]
[파이낸셜뉴스] 인간은 스스로의 본성을 적절히 통제하는 방법으로 자신과 사회의 안전을 보전하고 있다. 변덕이 우리의 본성이라서 일관성이 우리의 덕목이 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사람을 잘 신뢰하지 않으며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 곳에 그런 사람의 말을 참고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렇게 변덕스러운 사람이 그저 나의 친한 친구이거나 나에게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포용할 수도 있다. 뭐 어떤가, 나에게 무해한 변덕이라면.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유해한 변덕이다. 우리가 ‘일관된 기준에 따라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여 우리에게 안정적인 삶의 환경을 제공해줄 것이다’라고 믿고 우리의 권력을 나누어 준, 공권력을 집행하는 자들의 변덕은 매우 유해하다.
행정기본법은 이러한 변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 동법 제12조는 신뢰보호의 원칙이라는 표제 아래, 제1항에서 “행정청은 공익 또는 제3자의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행정에 대한 국민의 정당하고 합리적인 신뢰를 보호하여야 한다.”라고, 제2항에서 “행정청은 권한 행사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권한을 행사하지 아니하여 국민이 그 권한이 행사되지 않을 것으로 믿을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그 권한을 행사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들은 ‘행정청을 믿은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이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사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담당 행정기관에서 진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회신을 했다고 하자. 그런데 막상 사업 추진의 막바지에 이르러, 아무런 중요한 사정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정기관이 말을 바꾸면서 필요한 인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고 하면 사업을 추진하려고 한 사람은 그동안 들인 시간과 비용을 완전히 날려버리게 될 수 있다. 신뢰보호의 원칙이 작동하게 된다면 혹여 인허가 기준에 다소간 부합하지 않더라도 행정청을 믿은 국민의 권리를 구제하기 위하여 인허가를 해줘야 하게 될 수 있다.
실제 판결례들을 살펴보자.
약국개설등록이 가능한지에 대한 문의에 대해 담당자가 현장 확인 등을 거쳐 약국개설등록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은 후 임대차계약도 하고 인테리어를 한 사람에 대하여 약국개설등록 불가 처분을 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단한 사례(부산지방법원 2020. 12. 18. 선고 2020구합24111 판결), 공장설립에 관한 고시를 하여 놓고 그에 부합하는 공장신설을 불승인한 것은 위법하다고 본 사례(대전지방법원 2015. 10. 22. 선고 2014구합100428 판결), 시정명령에 따른 시정완료되었다는 내용이 통보되어 이를 믿고 행위 한 당사자에게 다시 그 내용에 반하는 시정명령을 내린 것은 위법하다고 본 사례(부산지방법원 2020. 8. 21. 선고 2020구합20744 판결), 의료인들은 새로운 의료기기를 병원에 도입하고자 할 때 그 적법성 여부에 대한 행정청의 선행의견을 듣고 결정하게 되므로 보건복지부장관과 그 산하기관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그에 관하여 일반에 공개하는 것을 전제로 제공한 의견은 공적 견해 표명이므로 그에 따라 행위한 자들에 대하여 행정처분을 하는 것은 위법하다고 판단한 사례(서울고등법원 2019. 4. 3. 선고 2018누70976 판결) 등 다양한 사례가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공권력의 언동이 국민의 업무나 재산상으로 해를 가할 수 있었던 경우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일상적인 삶의 계획에 큰 지장을 줄 뻔한 사안도 있었다.
A씨는 2006년 병역 신체검사 결과 신체등위 5급(본태성 고혈압)으로 병역 면제 판정을 받고 제2국민역으로 편입되었다. A씨는 투병 중인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도 하는 등 성실하게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을 해나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2008년 병역면탈자 조사 과정에서, ‘A씨의 혈압이 4급의 공익근무요원 소집대상에 해당하는 수치임에도 불구하고, 담당 군의관이 착오로 5급의 제2국민역 대상에 해당하는 혈압수치로 잘못 판정하였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이에 A씨는 다시 신체검사를 받은 후 제2국민역 병역처분에 대한 취소 및 공익근무요원 소집대상 병역처분을 받게 되었다. A씨는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하였고 법원은 ‘면제’라고 믿고 그에 부합하도록 생활을 영위해온 사람에 대하여 2년만에 갑자기 나타나 이를 취소하고 공익근무요원 편입처분을 하는 것은 위법하다고 판단하였다(대구지방법원 2009. 4. 22. 선고 2008구합2271 판결).
요컨대, 공권력의 변덕은 유해하다. 우리 법은 사후적으로나마 그러한 해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하여 신뢰보호의 원칙을 작동시키고 있기에 국민으로서는 그 때로는 그 원칙에 기대어야 할 수 있다. 하지만 공권력 스스로가 그 원칙에 의지하고자 한다면 더욱 유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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