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박꽃의 영화뜰]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개봉한지 20여 년 가까이 흘렀지만 여전히 성 소수자 영화의 대표작처럼 손꼽히는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을 처음 봤을 때, 사실 당사자들의 애달프고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에 온전히 몰입하지는 못했다. 이 주인공들은 모두 한 여인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은 유부남이면서, 낚시를 빌미 삼아 서로를 지속적으로 탐닉하며 십수 년을 보낸다. 그 영화적 설정이 심정적으로 영 편치 않았던 셈이다.
애니스 델마(히스 레저)의 아내 알마(미셸 윌리엄스)는 남편의 동성애를 알고 심지어는 그 상대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할)와의 격렬한 키스 장면까지 목격하게 되는데, 그 순간의 충격과 배신감이 비중 있게 묘사된 만큼 당사자들의 사랑에만 순수하게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영화 속 주인공의 심정에 어느 정도 설득될 수밖에 없었던 건, 이들이 카우보이 문화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던 1960년대 미국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허허벌판에서 목장을 꾸리며 남성성을 과시하듯 살아가는 이들의 집단 사이에서 동성을 좋아했던 남자가 어떤 비극적 말로를 맞이했는지, 애니스 델마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것도 모자라 성기가 뽑힌 채 피투성이로 사망해 널부러진 시신을 봤고, 그 사태를 주도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였다. 성 소수자라는 게 들통나면 그저 차별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극강의 공포에 시달리며 자란 주인공에게,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정체성은 솔직하게 드러내고 살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지금의 미국 사회는 성 소수자 간 결혼을 허용하는 등 비교적 개방적인 법을 운용하는 주가 많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이 배경으로 삼은 1960년대는 물론이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성간 관계에 대해 그다지 관용적이지만은 않았다. 성 소수자 영화 장르로 티모시 샬라메라는 새로운 스타를 탄생시킨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에서 묘사된 장면들도 비슷했다.
1980년대 이탈리아로 휴가 겸 연구를 떠난 미국인 올리버(아미 해머)는 연하의 남성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와 그야말로 뜨거운 사랑에 빠지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사회적 위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풍을 이기지 못하고 이성과 약혼하고 만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정신병자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원초적 두려움에 떨며 자신을 숨겨야 했던 그는 엘리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알았다면 날 교정시설로 끌고 갔을 거야.”
다만 제도가 바뀌면서 강고했던 인식도 차츰 따라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3년 매사추세츠 주법원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동성결혼을 허용했고, 2015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이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했다. 자연스럽게 사회문화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영화 역시 성 소수자의 존재를 보다 깊은 층위에서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됐을 것이다.
오스카 3관왕에 오르면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은 베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2016)는 마약에 중독된 어머니를 둔 흑인이면서 동시에 성 소수자이기까지 한 주인공의 삶을 이야기하며 호평받았다. 성 소수자라는 그 자체의 멍에보다는 복합적인 이유로 '남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개인의 비극에 보다 깊이 있게 접근하는 시선을 보여준 덕이다.
성 소수자에 대한 수용적이고도 깊이 있는 관점은 비단 미국뿐 아니라 비교적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닌 우리나라에도 차츰 스며드는 것 같다. 얼마 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동성 동반자에 대한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 주라는 판결을 내린 맥락도 비슷하다. 법리적 근거를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좀 복잡한 얘기가 되겠지만, 핵심은 결혼제도에 편입되지 않은 사실혼 관계와 마찬가지로 동성 동반자 역시 같은 사회보장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다룬 1심과 2심 판결문까지 모두 접해 읽어보니, 사회적 변화 앞에서 우리 국민 개인의 행복과 권리를 고민했던 법관들의 고심이 묻어난 문장이 유독 눈에 띄었다. 2심을 맡은 서울고법의 재판장은 2년 전 판결 당시 이렇게 썼다.
“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이기도 하다.”
새로운 삶의 형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어쩌면 앞서 언급한 그 어떤 영화 속 대사보다도 더 극적이고 힘 있는 문장이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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