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꽃이 귀한 여름에도 피고 지고 또 피어 [ESC]

한겨레 2024. 7. 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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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 가드닝 다이어리ㅣ무궁화
7월 초~10월 중순, 매일 개화
10년생 나무 1년에 3천송이
화려하진 않아도 굳센 생명력
지난 20일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 무궁화동산을 찾은 탐방객이 무궁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23년 전의 일이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 사랑’이라는 주제로 교내 사생대회가 열렸다. 그림에 특출난 재능이 없었던 내겐 너무나도 무료한 행사였지만, “일찍 끝낸 사람은 자유시간”이라는 담임 선생님의 한마디에 11살짜리의 마음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고 친구들과 놀면 얼마나 좋을까?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슥슥 색칠을 끝낸 도화지 위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흰 저고리를 입고 태극기를 흔드는 학생들, 군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 그리고 그들의 배경으로 푸른 숲으로 가득 찬 한반도. 대충 그리긴 했지만 뭔가 심심했다. 도화지의 테두리를 분홍색 꽃으로 가득 채워 그리니 뭔가 그럴듯해졌다. 빨리 놀고 싶은, 초등학교 4학년생이, 한 시간 만에 ‘나라 사랑’을 주제로 그릴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꽃. 조금 그려 넣기만 해도 없던 애국심이 저절로 생길 것만 같은 꽃이 바로 무궁화였다.

한국·중국·인도 등 폭넓게 자생

무궁화동산에 핀 무궁화 ‘서해’. 천리포수목원 제공

나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 무궁화는 나에게 딱 그 정도의 꽃이었다. 대통령 표장, 훈장, 배지, 상장 등 국가 상징물로 어디든 등장하는 꽃. 광복절, 현충일, 제헌절 등 나라의 중요한 기념일마다 미디어에 흔히 노출되는 꽃. 그러나 일부러 심어둔 학교나 공공기관 등을 벗어나면 평소에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꽃. 벚꽃이나 장미 같은 화려한 꽃나무보다 더 돋보이지 않아서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꽃.

아욱목 아욱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관목인 무궁화의 학명은 ‘히비스커스 시리아쿠스’(Hibiscus syriacus)다. 우리가 허브차로 자주 마시는 그 히비스커스, 맞다. 히비스커스차는 ‘로젤’(Hibiscus sabdariffa)의 붉은 열매를 우린 차인데, 무궁화와 같은 무궁화속이다. 하와이 원주민들이 훌라 댄스를 출 때 머리에 꽂는 붉은 꽃 ‘하와이무궁화’(Hibiscus rosa-sinensis) 역시 같은 무궁화속이다. 노란 꽃잎을 가진, 남부지방과 제주에 분포하는 자생 식물이자 멸종위기야생생물인 ‘황근’(Hibiscus hamabo)도 마찬가지다. 로젤, 하와이무궁화, 황근의 생김새를 찬찬히 살펴보면 화려한 색감의 넓은 꽃잎과 두툼하고 긴 수술통이라는 무궁화속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무궁화의 원산이 중동의 시리아로 여겨져 학명에 시리아쿠스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무궁화는 한국과 중국, 인도 등 아시아 지역에 폭넓게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이름처럼 잘 자란 10년생 무궁화 한 그루는 1년에 2천~3천여송이의 꽃을 피워낼 정도로 엄청난 생명력을 자랑한다.

무궁화는 꽃의 색에 따라 크게 단심계, 배달계, 아사달계, 무심계 4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단심계는 꽃잎의 중심부에 붉은 단심(무늬)이 있는 꽃으로, 꽃잎의 색에 따라 ‘안동’, ‘헤레네’ 등 백단심계(흰 꽃잎), ‘한사랑’, ‘무지개’ 등 홍단심계(붉은 꽃잎), ‘블루넘버원’, ‘서해’ 등 청단심계(푸른 꽃잎)로 다시 나뉜다. 무궁화 ‘백조’, ‘옥섭’ 등 배달계는 단심이 없는 순백색의 꽃이다. 아사달계와 무심계는 꽃잎에 무늬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아사달계는 단심이 있고 무심계는 단심이 없다. 보통 무궁화라고 하면 붉은 단심과 분홍색 꽃잎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푸른색·보라색·흰색뿐만 아니라 암수술이 겹꽃잎으로 변한 겹꽃까지 다양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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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우는 노력 덜해도 쑥쑥

무궁화동산에 핀 무궁화 ‘백조’. 천리포수목원 제공

현재 천리포수목원이 보유하고 있는 무궁화속 식물은 373 분류군에 이른다. 가장 처음 들여온 무궁화는 1973년 미국에서 온 ‘트라이컬러’였다. 이름처럼 한 그루에 흰색, 분홍색, 보라색의 세 가지 꽃이 피는데, 35년간 천리포 토양에 뿌리 내렸다가 2008년에 고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2000년 들어 전국 곳곳의 연구소에서 육종된 무궁화 품종을 들여오는 한편, 나라별로 종자를 교환하는 인덱스 세미넘을 통해 희귀한 무궁화 종자를 도입했다. 이렇게 모인 무궁화속 식물을 모아 2013년 1만㎡ 규모로 조성된 곳이 바로 무궁화동산이다. 무궁화 전에 피는 수국과 가을에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팜파스그라스를 함께 식재해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오랜 기간 볼거리를 더했다.

무궁화는 7월 초순부터 10월 중순까지 매일 꽃을 피워내는데, 새벽에 피는 꽃은 그 날 저녁 낙화한다. 새로 나온 줄기의 잎겨드랑이에서 꽃이 피기 때문에 꽃눈을 많이 만들기 위해 가지치기를 해주는 것이 좋다. 수목원에서는 냉해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보통 설날이 지난 뒤 가지치기를 한다. 자른 무궁화 가지를 노지에 삽목하기 좋은 계절은 3월 말~4월 초인데, 맹아력이 강해 금방 뿌리내리고 새 가지를 낸다.

수목원 가드너들은 1년에 두 번 유박(유기질 비료)을 무궁화동산에 뿌려준다. 가지치기를 한 뒤 봄철에 1회, 빗물에 녹아서 빠르게 스며들 수 있도록 장마철에 1회 뿌린다. 응애나 진딧물 등 흡즙성 해충의 피해는 사전에 방제한다. 최근에는 무궁화잎밤나방의 유충이 잎을 갉아먹는 피해가 있어 매년 2회 이상 예방 방제를 하고 있다. 무궁화는 진딧물과 같은 해충 피해가 비교적 많은 수종으로 알려졌지만, 햇빛이 잘 들고 물 빠짐이 좋은 곳이라면 어디서든 잘 자라는 특성 덕분에 정원 관리의 관점에서는 키우는 노력이 덜 드는 수종에 속한다. 꽃이 귀한 여름의 정원에 끊임없이 새로운 꽃을 피워내는 장점도 돋보인다.

무궁화 품종명에 수목원 가드너들의 실제 이름이 붙은 독특한 기록도 있다. 천리포수목원 식물이력관리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2017년 자연교잡으로 발아한 무궁화 가운데 모체와는 다른 특성을 보이는 22개 개체에 자체적으로 ‘충용’, ‘형석’ ‘인애’, ‘상우’ 등 수목원 직원들의 이름을 붙였다. 이곳 직원들이 누릴 수 있는 특전이다. 아직 정식 품종으로 등록된 건 아니지만, 가드너들은 이 개체를 무궁화품종보전원에 식재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중이다.

“나는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생물이 좋다.” 미국의 식물학자인 맷 칸데이아스는 그의 저서 ‘식물을 위한 변론’에서 특정 식물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한다. 알면 알수록 다양한 아름다움이 보인다. 무궁화도 마찬가지다. 국가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이유로 괜히 어렵게만 느껴졌다면, 무더운 여름철 주위를 잘 둘러보자. 무궁화속 식물들의 아름다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 화려한 색상의 꽃을 피워낸 가로수에서도, 시원하고 상큼하게 마시는 찻잔에서도, 하와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속 한 장면에서도.

황금비 나무의사

한겨레 기자로, 콘텐츠 기업 홍보팀 직원으로 일했다. 말 없는 나무가 좋아서 나무의사 자격증을 땄고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천리포수목원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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