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 실례 합니다~’ 그 시절 우릴 웃게 한 코너송…잘가요, 장두석
코미디언 장두석씨가 세상을 떠났다. 하루 차이로 별세한 김민기씨에게 세간의 관심과 애도가 쏟아진 데 견줘 장두석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훨씬 적었다. 생전 업적과 영향력 차이 때문이겠거니 이해하면서도 어쩌면 그래서 더 슬프고 서운했다. 나는 장두석과 함께 일한 적은 없지만 자주 콤비를 이뤘던 이봉원씨와는 형 동생으로 지내는 사이여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침 조문 가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고인에 대한 회고보다는 안부와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어쩌면 그것이 희극인들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30분도 채 안 되어, 이 칼럼을 담당하는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장두석에 관해 써보면 어떻겠냐고.
돌아보면 가수나 배우보다는 코미디언들과 더 자주 일했다. 내가 연출하는 프로그램 진행자만 해도 컬투·안선영·김지선·이경실·박수림·양세형·윤형빈·정성호…, 거기에 게스트로 더 많은 코미디언들을 만났다. 가수나 연기자도 주가 되는 장르가 있는 것처럼 코미디언들도 그렇다. 진행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캐릭터로 승부 보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또 누구는 즉흥 대사(애드리브)가 화려하다. 지상파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힘을 못 쓰다가 유튜브에서 대박을 터뜨린 코미디언들도 있다. 그렇다면 장두석은 어떤 코미디언이었을까? 그의 삶을 찬찬히 살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동시대 다른 코미디언들에 견줘 장두석이 특별했던 지점은 바로 음악과 개그의 접목에 있다.
먼저 경력을 살펴보자. 1980년 티비시(TBC·동양방송, KBS2의 전신) 개그 콘테스트로 데뷔한 그는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등의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누렸다. 김정식과 함께 ‘아르바이트 백과’를 만들어 히트시켰고 이봉원과 함께한 ‘시커먼스’는 최고 인기 코너 중 하나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도 시커먼스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 시절엔 연탄으로 얼굴을 칠하고 이봉원과 장두석을 따라 하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소풍이나 운동회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에는 여기저기서 시커먼스가 튀어나왔다. 이 코너는 20년 후 이수근·정명훈·장도연이 ‘키 컸으면’이라는 코너로 되살려내기도 했다. 젊은 독자들에겐 이 코너가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장두석의 재능이 가장 빛났던 코너는 ‘부채도사’라고 본다. 이 코너는 한국방송(KBS) 유튜브 채널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그 시절 코미디를 즐기고 싶은 분은 찾아보시길. 물오른 해학과 넉살은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 이번 칼럼을 준비하면서 몰아 보았는데 16회에서는 선거를 앞둔 후보들을 풍자한다. 누가 봐도 전두환인 후보도 부채도사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데, 군부정권 시절(1992년 1월19일 방영)이었음을 생각하면 대단한 용기다. 이 코너 역시 훗날 ‘무릎팍 도사’(MBC)를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의 모태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코너들의 공통점이 있다. 코너 내용보다 더 유명하고 인상적인 코너송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아~ 아~ 아르바이트. 오늘은 중국집이죠~”
“시, 시시시, 커, 커커커, 시커먼스~ 시커먼스~”
“실례 실례 합니다~ 실례 실례 하세요~”
장두석은 다른 코너에서도 종종 직접 기타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곤 했다. 데뷔 전부터 한국방송 노래자랑에 입상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개그맨이 된 후에도 주병진과 이성미와 함께 발표한 옴니버스 앨범에 직접 만든 노래를 실었고 1988년에는 이봉원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랩송 앨범으로 인정받는 ‘시커먼스’를 발표했다. 모창 재주도 뛰어나서 수십명에 이르는 인기 가수를 모창했는데 영상을 찾아보니 너무 많아서 세다가 그만두었다. 급기야 1990년에는 정식 솔로 앨범 ‘사랑한다 해도’를 발매했다. 코미디언이 개그송이나 캐럴이 아닌 일반 가요 앨범을 낸 최초의 사례다. 방송이 뜸해진 후에 오히려 음악 활동에 더 매진했지만 큰 인기는 없었다. 명상에 심취해 ‘명상 센터’를 세웠다가 사업이 실패한 뒤에는 재기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래만큼은 꾸준히 불렀고 자작곡도 종종 발표했다. 라디오 피디(PD)인 나조차도 몰랐던 노래들을 이제야 찾아 듣고 있노라니 비애가 더 깊어진다.
길지 않은 전성기를 누리고 쓸쓸하게 사라진 연예인이라는 식으로 그의 삶을 단정 짓지 말기를. 대신 그가 빛났던 순간을 기억하고 남겨놓은 유산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엄혹했던 그 시절, 그는 온몸을 던져 우리를 웃게 해주고 흥얼거리게 해주었다. 그저 감사한 일이다.
잘 가요, 나의 시커먼스, 우리의 부채도사.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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