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절망과 싸우는 방법 [새로 나온 책]

시사IN 편집국 2024. 7. 2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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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기자들이 직접 선정한 이 주의 신간. 출판사 보도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기자들이 꽂힌 한 문장.

좋아하길 잘했어

김원우 지음, 래빗홀 펴냄

“미래씨, 우리는 실패했어요.”

‘나’는 실패를 마지막에 두지 않는다. 실패를 반복하며 과정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상황에 침잠하는 대신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경계를 힘껏 넘는다. “내가 어디로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곳으로 세계를 끌어당기기” 위해. 이 각오는 이 소설집에 담긴 중편 세 편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각각 타임머신이 나오고 초능력을 사용하며 개가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노동·생태·동물권이라는 오늘의 이슈까지 솜씨 좋게 꿰어낸다. 어딘가 엉뚱한 구석이 있는 등장인물들은 묘하게 사랑스럽고 사려 깊다. 세계의 절망과 어떻게 싸워야 할까. 이 질문은 어쩌면 SF 작가가 가장 잘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좋아하길 잘했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출근길 지하철

박경석·정창조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투쟁이라.”

장애인 운동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상징이 된 박경석 대표는 군대에서 제대한 직후 행글라이딩을 하다 장애인이 되었다.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난 건 대학 3학년 때, 자신보다 ‘더 불쌍한’ 장애인들에게 봉사 교사를 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그대로 장애인 운동의 길에 접어들었다. 2021년, 출근길 지하철에 타는 행동을 시작할 때부터 어떻게 살지보다 어떻게 죽을지 더 많이 고민했다는 그의 삶과 투쟁을 기록한 책이다. 그의 말을 정리한 정창조 노들장애학궁리소 활동가는 활동가 박경석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탁월하다고 말한다. ‘닫힌 문 앞에서 외친 말들’이 담겼다. 현장이 박경석의 말을 완성한다.

 

상식의 독재

한윤형 지음, 생각의힘 펴냄

“저출생으로 사라질 나라일까, 새로운 역사적 흐름을 만들어낼까.”

‘최근 암암리에 퍼져가는 ‘조선 노예제사회’론 등 ‘조선사에 대한 폄훼’를 점잖지만 압도적으로 비판했네!’ ‘다른 나라들과 달리 대한민국의 지폐엔 근대 이전의 인물들만 인쇄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군’ 이런 감탄사를 속으로 뇌까리며 단숨에 읽어냈다. 저자의 관심사는 조선사가 아니라 ‘상식의 독재’가 통치하는 ‘지금 여기’의 한국. 이 책에서 ‘상식’은, 본인은 ‘상식’의 위치에 있는데 상대편은 ‘몰상식하다’고 믿는, 한국인에게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어떤 태도를 가리킨다. 저자는 근대 이전의 한국과 동서양의 인문학을 넘나들며, ‘상식의 독재’의 역사와 명암, 극복의 필요성을 규명한다. ‘코리아 피크’론이 등장하고 지정학적 위기가 전개되기 시작한 현 상황에서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읽을 가치가 있는, 치밀한 ‘한국론’이기도 하다.

 

교정의 요정

유리관 지음, 민음사 펴냄

“나는 지금 미쳐가는 교정공이다.”

‘사회에서 청소당하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고백하는 출판사 교정 담당자의 이야기다. 저자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그의 자리를 꿰찰 틈을 호시탐탐 노리는 인공지능 군단에서 그치지 않는다. 출판사의 하청업체 소속이라서 아무리 밤을 새우며 잘못된 문장을 뜯어고쳐도 완성본에 이름을 올릴 수 없을 때, 맡게 된 원고의 필자가 하필 ‘높으신 분’이라서 하나부터 열까지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해야 할 때, 그는 자신의 일터가 지옥임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터이다. 왜 알지 못하는 이가 끄적인 일기를 구태여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머지않아 없어질 일’이라 해도 거기에 있던 ‘사람’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우리의 일기장에도 같은 글이 적힐 것이다.

 

친밀한 슬픔

박종언 지음, 파이돈 펴냄

“시를 쓰는 건 삶을 찬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시집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마치 신문 기사에 나오듯 이름 석 자 옆에 괄호를 치고 나이까지 적어두었다. 직업도, 배경도 다른 이들이 읊조리는 말들은 스냅사진처럼 생생한 활자로 찍혔다. 그래서 사회면 기사를 읽는 것 같기도 하고, 읽다 보면 사회면 기사가 떠오르기도 한다. 20대 중반에 ‘생의 모든 명제가 무너져 내리는’ 조현병을 겪고 다니던 언론사를 그만둔 뒤 국내 최초의 정신장애인 당사자 언론 〈마인드포스트〉를 창간했던 박종언 전 편집국장이 낸 첫 시집이다. 자신의 삶을 아홉 줄로 간명하게 쓴 책날개에서부터 이미 시는 시작된다.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

이명제 지음, 푸른역사 펴냄

“제가 그렸던 소현세자와 너무 다른 소현세자를 마주하고 당혹감에 휩싸였습니다.”

병자호란에서 패한 이후에 소현세자는 인질이 되어 8년 동안 청의 심양(선양)에 머물러야 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뒤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이런 비극적 운명이 새로운 서사와 맞물리며, 소현세자는 ‘영웅’의 이미지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사신들의 기록을 통해 조선과 청의 관계를 연구한 저자는 어느 날 세간에 도는 ‘소현세자 서사’를 접하게 되었다. 연구를 통해 본 소현세자는 ‘존재의 미약함’에 가까운 인물이었는데, 그 글에선 강인한 소현세자가 되어 있었다. 그 차이에 호기심을 느낀 저자는 소현세자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인간’ 소현세자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는지, ‘영웅’ 소현세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핀다. 기존 ‘독살설’도 재검토한다.

시사IN 편집국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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