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아빠와 살지 못해 방황하던 15살, 120km 걷게 했더니…[남기자의 체헐리즘]

학대 피해 아동 '지유'와 멘토 '주은씨'의 8박9일 도보 여행
매일 15~20km씩 걸으며 심어진 자신감, 고비 극복하며 회복되는 생명력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 "학대 피해 아동들, 정서적인 부분 많이 힘들어해…살아갈 밑거름 된단 의미"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 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세상이 처음 불편해졌지요. 직접 체험해 알리는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체험과 저널리즘을 합친 말입니다. 사서 고생하며 깊숙한 이면을 알리고, 가장자리가 보이도록 힘쓰려합니다.

버려진 거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 위를 걷는 경험. 사단법인 만사소년이 진행하고,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가 후원한 '2인3각' 도보 여행. 학대 피해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던 지유(오른쪽, 가명)에게, 삶의 방향을 찾아줄 디딤돌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왼쪽은 멘토인 이주은씨(사회복지공무원, 43)./사진=가방도 안 멘 주제에 꼴찌로 걷고 있는 남형도 기자

"5분 전에 고지하고 폰 뺏어갔어. 저 그날 알았잖아요. 제주에서 완전 브이로그를 찍을 생각이었는데…."

15살 지유(가명)가 제주에 온 첫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분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청 반바지, 하얀 샌들, 쪼그만 배낭을 메고 공항에 도착한 날. 여행 가는 줄 알고 잔뜩 기대했을 아이. 아무렴 당황했겠다, 하고 맞장구쳐주며 그래서 어떡했느냐고 물었다.

"한 2~3분 정도 충격받았다가 이겨 냈어요. 이게 고난과 역경을 견디는 '걷기'라고요? 저를 어떻게 봤길래. 이 정도로 하나도 안 힘들거든요!"

지유는 이를 증명하려는 듯 성큼성큼 길을 서둘렀다. 땀으로 흠뻑 젖은 흰 티에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 시원하다며 발목까지 걷은 기능성 바지에 이미 흙이 곳곳에 묻은 운동화. 자기 몸만 한 까만 배낭이 흔들릴 때마다, 텀블러 속 얼음이 경쾌하게 '달그락달그락' 거렸다. 그 소리가 청량한 여름의 리듬 같아 좋았다.

매일 15~20km씩 걸어야 하는 힘든 일정. '걷기 여행'에 참가한 아이들은 통상 5~6일째 고비를 맞는다. 그걸 극복한 아이들에게선 놀라운 생명력이 회복된다고 했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주은씨와 지유./사진=부지런히 뒤따라가고 있는 40대 남형도 기자

한여름 안개가 자욱한 습한 한라산. 길가에 박힌 돌엔 '해발 1400m'라 적혀 있었다. 경사가 급해지자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땅겨왔다. 주변은 온통 하얘서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았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유의 걷기 짝꿍이자 '멘토'인, 주은씨가 결국 이리 외쳤다.

"공주야, 우리 물 한 모금 마시고 갈까? 아이고, 쫓아가느라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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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엄마·아빠와 살 수 없게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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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저 단순한 여행으로 생각해, 가벼운 차림으로 왔단 지유. 핸드폰도, 늘 듣던 음악도 없이, 난생 처음 겪는 경험. 그러나 묵묵히 걷기 시작했단다./사진=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지유가 어린 나이에 겪었다는 일들을.

엄마와 아빠의 결혼이 깨졌다. 아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에 컸다. 지유는 이내 방황했다. 거짓말을 하거나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조부모와 살다가 아빠에게 갔으나 그 역시 키울 수 없게 됐다. 결국 '그룹홈'이 집이 되었다. 학대당했거나 부모와 살 수 없는 아이들이 함께 사는 곳. 겨우 초등학생인데 그 많은 부침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지유는 아무렇잖은 듯, 다 괜찮다며 지냈다. 그러나 잦은 거짓말과 문제 행동을 보였다.

세상에 의지할 이가 없단 생각. 그로 인해 힘들었을 마음. 그러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거였다. 그룹홈 시설장은 지유를 안타까워했다. 아이가 현실을, 자기 마음을 그대로 직면했으면 좋겠다고. 심리상담도 치료도 무용하다 느낄 때 붙잡은 게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도보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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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살 주은씨와, 15살 지유의…120km '걷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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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가 소년이기에 '만사소년'이라 불리는 천종호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맨 왼쪽)와 멘토 이주은씨, 학대피해 아동인 지유, 그리고 도보여행을 후원한 공혜정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대표(맨 오른쪽). 공 대표는 "학대 피해를 당한 아이들 의식주엔 다들 관심이 많지만, 자존감과 삶의 질, 정신적 성장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낮다"며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사진=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어른 멘토와 멘티가 8박9일 동안 매일 15km씩 걷는 여행이란다. 사단법인 '만사소년'이 후원받아 2015년부터 해왔다. 이름하여 '2인 3각 도보여행'. 발을 묶듯 서로 마음을 맞춰 걸어보란 의미. 올해는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이하 대아협)'가 1000만원을 들여 네 팀을 후원했다. 공혜정 대아협 대표에게 이유를 물었다.

"학대 피해당한 아이들은 여러 정서적인 부분에서 힘들어해요. 상처투성이 삶으로 위축되고,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열등감이 생길 수 있고요. 걸으면서 스스로 고난을 이겨보고, 성취할 수 있단 자신감을 얻자는 거지요.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요."

보이지 않는 상처마저 염려하는 좋은 어른 아닌가. 함께 걸어보고 싶었다. 참여한 건 다섯 번째 날이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해 서귀포로 향했다. 그날은 한라산에 가는 날이었다. 영실에서 윗세오름을 거쳐 어리목까지 걷는 길. 멘토 주은씨(사회복지 공무원), 지유와 주차장에서 만나 인사하고 바로 걸었다.

힘들 땐 자주 쉬고, 잘못 길을 들면 되돌아가기도 하고, 스스로 한계를 느껴보기도 하고. 다만 꾸준히 계속 나아간다면 그날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던 어느 날, 주은씨가 지유에게 말했다. "우리 삶도 이정표를 따라가듯 살면 좋겠지만, 말처럼 쉽지 않더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망설여질 땐, 급히 행동하기 보단 누군가에게 조언도 구해보면 좋을 거야."/사진=두 사람의 다리를 길게 찍으려 애쓴 남형도 기자

짙은 초록 잎이 별처럼 쏟아지고 일렁이던 여름. 온 하늘에 커다란 빗방울을 머금은 듯한 흐리고 습한 날. 지유가 보란 듯 빠르게 앞장서 나갔다. 어른 걸음으로도 쫓아가기 힘들 속도였다. 15살 지유, 42살 남형도(본인), 48살 주은씨(멘토) 순서로 걸었다(나이 적은 순으로 빠르다, 아).

죽을 것처럼 힘들 무렵엔, 어딘가에서 쉴 수 있게끔 공간이 있었다. 산을 오가는 사람들과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서로 응원하고 북돋아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처음엔 그런 것들이 어색했지만, 갈수록 편안해졌다고 했다. 얼마 안 남았어요, 그런 말에 힘이 났다고. 도보 여행을 하는 주은씨와 지유에게, 스쿠터를 타고 가며 엄지를 척 올리던 사람도 있었다./사진=숨이 턱끝까지 차서 헉헉거리면서도 사진 열심히 찍은 남형도 기자

지유가 때때로 뒤돌아보며 우리와 속도를 맞췄다. 그러더니 이리 말했다.

"쌤, 오늘은 이 정도면 괜찮겠는데요? 엄청 힘들다고 했는데." (지유)

"공주, 안 돼, 그런 말 하면. 그런 거 몰라? 응급실에서 오늘 괜찮다고 하면 위급 환자 온다." (주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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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2리터씩 마셔도 화장실에 안 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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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가 불편한 게 없는지 늘 어딘가를 살펴주던 좋은 멘토, 주은씨./사진=흐뭇하게 바라보는 남형도 기자

아닌 게 아니라, 전날엔 고생이 심했다고 했다. 지유가 말했다.

"진짜 건물이 하나도 없었어요. 도로만 따라 걸었으니까요. 여기서 쓰러져도 날 아무도 못 볼 것 같은 거죠. 남아 있는 건 악이랑 깡밖에 없었어요. 재밌는 게 뭔지 알아요? 물을 2리터씩 마시는데 화장실에 한 번도 안 가고 싶은 거예요. 땀으로 다 배출하니까. 내내 생각했어요. 쓰러지면 헬기라도 띄워주겠지."

2km 정도 걷다가 중간에서 쉬며 들은 얘기. 힘듦을 겪고 견디면 무용담이 된단 것. 지유가 말할 때 표정에 활기가 있어 좋았다. 마치 정글의 법칙을 찍는 것 같았다고. 여기 와 도마뱀도 처음 봤고, 지렁이며 신기한 벌레를 다 봤다고. 말벌도 이제 안 무섭다며.

안개가 너무 자욱한 날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사진=안경 없으면 어색해서 얼른 쓰고 싶은 남형도 기자

영실에서 윗새오름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고도가 계속 높아지는 길이라 쉽잖았다. 햇볕은 없었으나 습해서 안경이 뿌옇고 땀이 줄줄 흘렀다. 모자가 삽시간에 흠뻑 젖었다. 지유는 여전히 파이팅이 넘쳤다. 주은씨는 지유를 살피며 뒤따랐다. 산이 왜 이리 큰가, 죽겠다 싶을 때쯤엔 희한하게 경사가 완만해졌다. 그러지 않을 땐 멈춰서 쉬면 되었다. 주은씨가 말했다.

"난 세상에서 물이 이렇게 맛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여기 와서."

땀에 흠뻑 젖은 채, 시원한 바람이 강하게 부는 순간 내지르는 탄성. 그 기쁨이란./사진=두 손을 번쩍 들고 싶은데 일하느라 참은 남형도 기자

그 순간 몸 전체를 감싸듯 엄청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지유가 탄성을 지르며 두 팔을 올렸다.

"우아아아와아아아, 너무 시원해!"

고생하며 땀을 흘린 이들만 느낄 수 있는 찰나의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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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일기장이 젖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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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강하게 부는 로키 산맥엔 '무릎 꿇은 나무'가 있다. 얼마나 거세게 부는지, 무릎을 꿇은 것 같은 모습으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거라고. 그만큼 거센 시련을 맞은 나무들이라고.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바이올린은, 이 무릎 꿇은 나무로 만든다고 했다. 그 얘기가 떠올랐다. 지유에게 들려주고 싶었다./사진=바람 맞느라 들려주지 못한 남형도 기자

고도가 200~300m씩 높아져 갔다. 1500m 고지에 다다랐다. 바람이 점차 거세어졌다. 시원하다던 바람이 추워졌다. 주변은 온통 뿌옇게 보였다. 마치 구름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지유가 말했다.

"천연 미스트 같아. 근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부니까, 기분이 좀 별론데요. 하하."

내 모자가 거센 바람에 날아가 풀더미에 박힐 정도.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라산 고지대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지유가 가방을 방수 커버로 쌌다. 알고 보니, 어제 가방이 물에 젖었단다. 제일 아끼는 일기장이 물에 젖어 속상했다고. 글씨도 조금 번졌다고 했다.

살면서 네가 이 경험 또한 희미해질 날이 있겠지. 그러므로 상세히 기록해둔다. 언젠가 살다가 또 힘든 날, 부적처럼 이 글을 품고 자꾸 보기를. 내가 이런 걸 해냈던 사람이라고. 용기를 또 낼 수 있도록./사진=그 젊음이 부러운 남형도 기자

허투루 한 고생이 아녔다고. 이날은 촘촘히 준비해 온 지유를 보며 느꼈다. 모기 기피제를 미리 뿌리자고 얘기한 것도 지유였다. 그게 아녔으면 '신선한 모기 헌혈차'가 될 뻔했다. 주은씨가 말했다.

"어제 공주랑 상의했거든요. 산에 올 때 정말 끼니가 되는 햄버거 같은 걸 살까, 아니면 다른 걸 살까. 지유가 그러는 거예요. 쌤, 햄버거는 습하면 채소도 있고 상할 수 있다고. 단백질바를 사서 칼로리만 보충하고, 하산해서 밥 먹자고요. 좋은 방법이라고 했지요."

지유가 나눠준 소중한 단백질바. /사진=반쪽은 역시 모자랐지만 얻어 먹은 주제에 차마 말 못한 배고픈 남형도 기자

지유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는 그 경험. 그게 소중한 거라 했다. '호통판사'로 유명한 천종호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저서 '내가 만난 소년에 대하여'에서 이리 남겼다. 그는 2인 3각 도보 여행을 기획한 사람이기도 하다.

"오로지 한 아이를 존중하기 위한 여행입니다. 하루에 정해진 15킬로미터 내지 20킬로미터 거리를 걷는 걸 빼면, 나머지 시간은 모두 아이에게 주도권을 줍니다. 끼니마다 무얼 먹을지 아이가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다른 아이와 비교해 잘 걷는지 못 걷는지 평가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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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거 보면 화나요"…발 아파도 괜찮다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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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유의 가족과 함께, 좋은 어른이 되어 제주에 다시 오기를./사진=남형도 기자

윗세오름 대피소에 다다랐다. 해발 1700m까지 올라간 거였다. 거기서 단백질바를 먹으며 또 쉬었다. 허벅지랑 종아리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돼 있었다. 이제 어리목까지 가면 코스를 마치는 거였다. 내려갈 길이 걱정이란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처음 안 사실이 있었다. 지유가 '평발'이란 거였다.

"제가 평발이란 말이에요. 많이 걸으면 아파, 그러잖아요. 근데 괜찮아요. 적응된 거죠. 평발이 아닌 건 아닐까요, 하하."

그러고 보니 괜찮단 말을 참 많이 했다. 그룹홈에서 함께 지내는 언니가 나간 뒤, 대뜸 전화해 욕할 때도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생전 처음 들어본 욕을 쏟았다고 했는데도. 오늘 등산 코스 역시 무난하다고 했다. 산책 코스라고. 산길을 8km 넘게 걸어, 평소 운동을 많이 하는 나 역시 다리가 후들거리는데도.

지유의 감귤 모양 우비 모자를 채워주는 주은씨./사진=남형도 기자

그런 지유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뒤따라 내려갔다. 크고 작은 돌들이 많아 쉽지 않았다. 돌을 디딜 때마다 지유 발이 떨리는 게 보였다. 발을 삐끗할까 싶어 염려되었다. 주은씨도 걱정되는 듯 '무릎 보호대'를 하지 않겠느냐 물었다. 지유가 괜찮다고 고갤 저었다. 발이 꽤 아플 텐데도.

그러다 결국 접질렸다고 말할 때마저 안 아프다고 했다. 중간중간 쉬는 도중, 아빠와 10대로 보이는 아들이 내려가는 걸 봤다. 아들은 지팡이를 탕탕 찍으며, 괴로워하며 인상을 많이 구긴 모습이었다. 힘듦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걸 지유가 보더니 이리 말했다.

"저런 거 보면 화나요. 약해서 화나는 것 같아요. 뭘 해도 잘 못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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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도 괜찮아, 쌤도 힘들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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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워서 기분 좋았던 한라산의 물./사진=너무 더워서 풍덩 빠져버리고 싶은 남형도 기자

아픔과 힘듦을 꼭꼭 숨기는 게 습관이 됐을지. 그게 생존에 유리하단 걸로 배웠을지.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불신이 커서 약점이 될까 두려운 걸지. 그런 지유를 보며, 조심스레 짐작했다.

그러나 말수가 줄어드는 걸로 보아 알고 있었다. 씩씩하게 잘 버틴 지유도, 연일 15~20km씩 걷는 강행군에 지칠 수밖에 없단 걸. 멘토인 주은씨도 그게 보이는듯했다. 보채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얘길 털어놓는 걸로 대신했다. 사회복지 공무원을 하며 죽을 듯 힘들었던 일로.

날씨가 시시각각 변했다. 삶의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삶과 산이 참 많이 닮았다고./사진=남형도 기자

"자기가 받는 수급비가 줄었대. 전화 와서 항의하는데, 내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 그러는 거야. 내가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싶었지."(주은)

"하하, 그럼 아픈뎅? 그래야죠."(지유)

"그래서 그랬어. 선생님, 말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줄 아냐면서, 오셔서 그대로 안 하시기만 해보세요, 그랬어. 그날 사표 쓰려고 했지. 진짜 왔더라고. 근데 오면서 이미 화가 한풀 꺾였더라. 진상 만나 개망신 당한 날마다 스타벅스 가서 텀블러를 하나씩 샀어. 부끄럽긴 한데 내 보상심리였달까." (주은)

망원경으로 차가 움직이는 것까지 자세히 보던 지유. 주은씨가 망원경을 볼 때, 렌즈를 막으며 장난치기도 했다. 그 모습도 좋았다./사진=함께 장난치고 싶었지만 체면상 참은 남형도 기자

지유가 너무 좋다고 했다. 들으며 배우길 바랐을 거였다. 기분 나쁘고 힘들 때, 감정을 건강히 표출해도 괜찮단 걸. 인간은 누구나 약하기에, 아이든 어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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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고 털어 놓은 아이…무릎 보호대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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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 땐 아프다고 얘기해도 괜찮다고. 곁에 있는 믿을만한 누군가에게는. 무릎 보호대를 채워주는 주은씨./사진=남형도 기자

막바지 내리막길에 지유가 멈춰서 섰다.

"아아아, 뭐가 들어갔어요."

신발에 가시가 들어간 거였다. 아플 때 아프다고 바로 표현한 게 좋았다.

내내 입고 있던 감귤 색깔 우비를 벗겠다고 했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거의 젖은 빨래 수준이었다. 지유는 '레전드'라며 뿌듯해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완주를 축하한다고, 정말 고생 많았다고 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사진=정류장까지 30분 더 걸어야 한단 소식에 좌절한 남형도 기자

무릎 보호대도 하겠다고 했다. 주은씨가 지유를 앉게 했다. 무릎을 펼치게 한 뒤,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었다. 앉았을 때 하는 것과 서서 했을 때 하는 게 다르다고. 방법을 일러주고 스스로 하게끔 하는 것도 좋았다. 지유가 무릎을 보호대로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몇 걸음 내딛더니 이리 말했다.

"오, 무릎이 지지 되니까 훨씬 좋아요."

그리 10km가 넘는 코스를 완주했다. 어리목 출입구를 나오며 지유는 와,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해냈다는 뿌듯함. 힘듦의 한계를 끌어올려 본 경험으로, 앞으로의 삶도 흔들릴지언정 완주할 수 있을 거라고.

마침내 도착한 240번 버스. 이날도 15km 정도 걸었다. 그것도 산길로./사진=빨리 에어컨 쐬고 싶은 남형도 기자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지유가 주은씨에게 말했다. 그다음 날 일정에 대한 거였다.

"쌤, 오늘 아침엔 다행히 눈이 너무 잘 떠졌는데요. 내일 성산일출봉 일출 볼 땐 새벽 4시라서, 그땐 깨워 주셔야 할 거예요. 벌떡 일어날 수도 있지만요."

그리 도움을 청하는 것도, 시원한 버스에 앉자마자 곤히 단잠에 빠져버린 모습도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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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를 극복한 아이들에게, 생기는 놀라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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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소년과 성인 멘토가 3개월간 1600km를 걷는, 프랑스 '쇠이유' 도보 여행 프로그램.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존중해주는 성인 멘토 옆에서, 아이는 세상과 타인,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간다./사진=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2인 3각 도보 여행은 프랑스의 '쇠이유'란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얻었다. 비행 소년과 성인 멘토가 3개월간 1600km를 걷는 여행이라고. 이를 완주하면 판사와 법원 직원들이 성대한 파티를 열어준다. 그리고 여행을 마친 청소년의 재범률은 15%로, 일반 비행소년 재범률인 85% 대비 극히 낮단다.

실제 경험담이 궁금했다. 쇠이유를 설립한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저서 '쇠이유,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엔 이런 얘기가 나왔다. 2002년에 함부르크에서 베니스까지 걸었다는 발레리 얘기였다. 소년 범죄를 저질렀고 마약까지 했던 청소년이었다. 그가 '걷기 여행'에 대해 이리 말했다.

위기에 처한 아이를 위해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으려는 사회의 냉소와 허무주의. 이에 맞서고자 쇠이유는 오늘도 아이와 함께 문턱을 넘는다./사진=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걷기는 내게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다. 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되찾았다. 누군가 내게 '넌 나쁜 짓을 했잖아'라고 말하면 난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 하지만 좋은 일도 했다고.' 그게 바로 걷기였다. 그 일은 내게 정말로 도움이 되었다. 지금 내겐 배우자와 두 살된 어린 아들이 있다. 1년 전부터 작은 회사에 전념하고 있다. 일이 잘 되어가고 있어서 만족스럽다."

지유도 오로지 두 발에 의지해 걸었던,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 있었다./사진=멘토 이주은씨

같은 책에서, 청소년 담당 판사는 그 가치에 대해 이리 말했다.

"걷고 난 후 아이들이 참조할 수 있는 긍정적인 행위의 기억이 남는다는 것이 커다란 장점이다. 그들은 마흔, 쉰, 예순 살이 되어도 젊은 시절에 경험한 여정에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지유가 직접 쓴 손편지. 땀을 많이 흘리면 화장실에 자주 안 가도 된단 걸 깨달았던 하루./사진=지유 멘토 주은씨

천종호 판사도, 실제 2인3각 여행에 참가한 아이들 대부분 삶에 큰 변화를 보였다고 책에 담았다.

"우울증 약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이가 약을 끊어 주치의를 놀라게 한 일, 아동학대를 당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던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된 일, 엄마와 갈등으로 가출해 성매매를 하며 절망의 끝을 달리던 아이가 회복돼 원하던 대학에 들어간 일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8박 9일의 짧지만 긴 이 여행이 아이들에게는 큰 축복임이 분명했습니다."

인생의 역경을 이겨낼 힘을 기르는 걷기 여행이라, 참 좋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사진=지유 멘토 주은씨

에필로그(epilogue).

산을 걷다 쉴 무렵에, 지유에게 하고픈 일이 있는지 물었다. 눈을 피하다 마주치다를 반복하며 아이가 말했다.

"지금 말씀드리기 좀 그렇긴 한데, 화장도 안 하고 날 것 그대로라서. 승무원을 하고 싶단 말을 할 수가 없는데. 저 원래 예쁘거든요, 진짜로. 화장한 얼굴이, 내 얼굴인 건데…."

그런 지유에게 주은씨가 말했다.

"공주야, 너 화장하면 화장한 대로 예쁜데, 지금이 훨씬 예뻐."

그러고 보니, 지유에게 이름과 공주란 말을 함께 썼던 주은씨에게 나중에 이유를 물었다.

날이 흐려 해를 못 볼 걸 알면서도, 새벽에 성산일출봉으로 향한 두 사람. 일출이 목적이 아니라, 그걸 보기 위해 함께한 도전이 뜻깊었단다./사진=지유 멘토 주은씨

그 대답을 지유도 보면 좋을 것 같아 이리 남겨둔다.

"큰 애랑 둘째가 딸이에요. 집에서 딸래미들 부를 때 큰 공주, 작은 공주, 이렇게 부르는데요. 어디서든 무례함을 당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존귀하게 여겨지는 사람이기를 원해서입니다."

그리고 이리 덧붙였다.

"이런 마음은 딸들뿐 아니라 지유에게도 똑같아서, 은연중에 그리 불렀나 봅니다."

우비가 너무 길어 지유의 소매를 걷어주는 주은씨. 끝으로 그가 지유에게 말했다. "인생 어느 한 자락에서, 어떤 나이 많고 통통한 멘토가, 땀에 젖은 옷을 세탁해주고 더러워진 신발을 빨고 말려주며, 이 힘든 도전을 누구보다 응원했단 걸. 포기하지 말라고 간절히 기도했음을 먼훗날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사진=남형도 기자

남형도 기자 human@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