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구름이 솟아나…울릉도 성인봉 네발로 올랐다 [ESC]
986m 성인봉…섬 면적 대비 최고봉 높이 비율 국내 1위
이틀간 내수전전망대·나리분지·깃대봉·성인봉 26.4㎞ 코스
밀림 속 운무 위 쭉 뻗은 나무 ‘천연식물원’…걷는 고단함 잊어
구름이 바닷바람을 타고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푸른 하늘과 쪽빛 바다의 경계선이 모호한 비경을 구름막이 열고 닫았다. 사람들은 구름막이 열릴 때 “신선처럼 구름 속에 있는 거 같다”고 탄성을 지르며 천혜의 풍광을 카메라로 담기에 분주했다.
지난달 29일 오른 경북 울릉도 최고봉에서의 풍경. ‘성인봉, 해발 986m’라고 음각돼 있는 표지석이 서 있는 정상은 잡목과 섬조릿대에 둘러싸여 있어 시야가 답답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조붓한 오솔길을 따라 20m 정도 내려가니 전망이 탁 트이고 가슴이 뻥 뚫렸다.
“스스로 이겨내 성취감 느끼시라”
대한민국에서 9번째로 큰 섬인 울릉도는 신생대(250만~5천년 전)에 바다에서 두차례의 큰 폭발로 화산이 분출돼 형성된 이중 화산이다. 이 폭발들로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넓은 평지(198만㎡)인 나리분지가 형성됐고, 알봉(538m)도 생겨났다. 울릉도는 해저로부터 약 3천m 높이로 솟아 있는 거대한 화산체다. 이 중 약 30%가 육상에 노출돼 있고, 나머지 70%는 바다에 잠겨 있다. 섬 전체 면적과 최고봉의 높이 비율이 13.5로 국내 섬 중 1위다. 제주도의 경우 면적과 한라산(1950m) 높이 비율은 1.1이다. 성인봉까지 오르는 길이 유난히 ‘뾰족하게’ 느껴졌던 이유다.
지난달 27일 밤 11시50분 경북 포항 영일만신항에서 울릉도행 배를 탔다. 28일부터 코오롱스포츠 주최로 열리는 ‘데어 투 다이브 울릉’(DARE TO DIVE ULLEUNG) 아웃도어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울릉도 사동항까지 6시간30분이 걸렸다. 객실에서 눈을 붙이니 어느새 울릉도에 도착해 있었다.
사동항에 내려 첫날 미션의 출발지가 될 저동항으로 이동했다. 저동항 어판장에서는 어민들이 오징어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분리하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부산물을 얻어먹으려 모여드는 괭이갈매기 수백마리의 모습이 진풍경이었다. 인근 청주식당에서 아침 식사로 따개비밥(1만8천원)을 먹었다. 갯바위나 암초에 붙어 사는 지름 2㎝ 안팎의 따개비는 졸깃하고 고소했다.
오전 8시10분, 하이킹 출발 전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됐다. 코오롱스포츠 관계자는 “코스가 쉽지 않고 부침과 도전이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스스로 이겨내고 성취감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가시기 바란다”고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남한권 울릉군수는 “감탄스러운 자연을 가진 울릉도의 속살을 제대로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란다”고 응원했다.
자생 우산고로쇠나무 군락의 자태
첫날 하이킹 코스는 ‘저동항-내수전전망대-석포매점 갈림길-장재-나리분지’ 12.4㎞였다. 60명의 참가자가 함께 출발했다. 이내 햇볕과 해풍에 구덕구덕 오징어가 건조되고 있는 덕장이 나타났다. 비릿한 내음을 풍기는 목가적인 어촌 풍경은 참가자들의 ‘포토존’이 됐다. 바다를 뒤로하고 오르막 임도로 들어섰다. 땡볕 아래 가파른 길에서 한걸음씩 옮기며 ‘시작부터 만만찮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윽고 출발 1시간5분 만에 내수전전망대(440m)에 도착했다. 전망대에선 바닷바람도 시야도 시원했다. 왼쪽으로는 울릉도의 부속섬 44개 중 죽도와 관음도가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저 멀리 90㎞ 떨어진 곳에 독도가 있다고 안내판에 나와 있었다. 맑은 날이었지만 독도가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울릉도에서 독도를 볼 수 있는 날은 1년에 10여차례 정도라고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오자 숲길 하이킹이 시작됐다. 오른쪽 수풀 사이로 바다와 죽도가 보이는 해변 숲길을 1시간가량 걸었다. 울릉도에 딸린 섬 중 가장 큰 죽도는 김유곤(55)씨 1명이 더덕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유인도다.
석포매점 갈림길에서 나리분지까지는 오르막길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이날 하이킹의 최대 난코스였다. 날씨가 무더워도 긴바지를 입고 오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릎 높이의 잡목들에 다리가 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자욱한 운무가 깔리면서 신비로운 숲속 분위기가 연출됐다. 특히 뿌연 운무 속에서 쭉쭉 뻗은 울릉도 자생 우산고로쇠나무 군락 자태는 장관이었다.
가는 길에 드문드문 초코바·사탕 껍질, 페트병 등 쓰레기들이 보였다. 일행 중 정호진(26)씨가 눈에 띄는 쓰레기를 주우며 이동하는 클린 하이킹(등산하며 쓰레기를 줍는 활동)을 실천했다. 목적지인 나리분지에 도착했을 때 쓰레기봉투가 거의 찼다. 그는 “쓰레기가 많이 보여 그냥 주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윽고 나리분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시계는 오후 3시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동항을 출발한 지 6시간50분 만이었다. 이날 12.4㎞를 걸었고 누적 상승고도는 1400m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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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로 오른 성인봉
다음날 숙소에서 꿀잠을 자고 일어나 나리분지에 있는 야영장 식당에서 산채정식(2만5천원)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부지깽이나물·취나물·눈개승마(삼나물)·도라지에 밥을 비볐다. 명이(산마늘)·땅두릅·참고비·홍감자·목이버섯 등 푸짐한 반찬도 곁들여 엉겅퀴 된장국과 함께 먹었다. 울릉도의 싱싱한 식재료로 조리된 한끼 식사는 둘째날 활동의 훌륭한 연료가 됐다. 이날 참가자들은 산을 오르거나(하이킹), 뛰거나(트레일 러닝), 암벽을 등반(클라이밍)하는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이킹 희망자가 30여명으로 가장 많았다. 하이킹 코스는 나리분지를 출발해 ‘밀밭-깃대봉-밀밭-말잔등-성인봉-말잔등-장재’를 거쳐 다시 나리분지로 돌아오는 14㎞ 구간이었다. 박충길(57) 울릉산악회 구조팀장 등 울릉산악회 집행부 3명이 함께하며 길을 안내했다. 청명한 날씨 속에 오전 9시10분 나리분지를 출발했다. 그러나 30분 만에 이튿날 우리를 싣고 나갈 배(30일 오후 12시30분)가 풍랑경보로 결항된다는 문자메시지가 떴다. 오늘 날이 이렇게 좋은데 풍랑경보라니! 변화무쌍한 울릉도의 날씨였다. 섬에서 예정보다 하루 더 머물 수 없는 10여명이 하이킹을 중단하고 항구로 향했다.
동료들을떠나보내고 남은 이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1시간 만에 깃대봉(605.6m)에 도착했다. 앞쪽으로는 눈이 시리도록 파란 바다와 유명한 코끼리바위(공암), 예리한 송곳봉, 올망졸망한 평리마을 풍경이 서정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뒤쪽 산 경관도 못지않았다. 미륵봉(901m) 좌우로 두툼한 흰 구름이 마치 화산에서 마그마가 뿜어져 나오듯 몽개몽개 퍼져나가고 있었다. 산에서 구름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이제 남은 목표 지점은 거대한 하나의 화산인 울릉도의 정점, 성인봉이었다. 녹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빽빽한 원시림은 뾰족하게 솟은 성인봉 가는 길의 고단함을 잊게 했다. 영화 속 타잔이 줄타기하며 다닐 법한 가늘고 긴 다래넝쿨을 비롯해 너도밤나무·섬단풍나무·섬피나무 등의 수목들과 공작고사리·일색고사리 등 양치식물, 섬초롱꽃·섬말나리·섬바디 등 다양한 식물을 볼 수 있었다. ‘울창한 언덕 섬’ 울릉도는 이름 그대로 울창했다. 이 지역에 자생하는 식물은 약 750종으로 마치 천연식물원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이러한 자연의 가치를 인정받아 성인봉 원시림은 1967년 천연기념물 189호로 지정됐다.
오르막길을 앞서가던 박충길 팀장이 녹색 바탕에 길쭉한 옅은색 무늬가 선명한 잎을 가진 키 작은 식물을 가리키며 멈춰 섰다. 식물의 이름은 섬남성. “약용으로도 이용되고, 독성이 강해 조선시대에 사약의 재료로도 쓰였다”고 설명했다. 작고 붉은 열매를 맺은 말오줌나무를 가리키며 박 팀장은 “골절에 좋다는 의미로 ‘접골목’이라고 불리는데 작고 동그란 붉은 열매는 흑비둘기의 주식이기도 하다”고 했다. 흑비둘기는 울릉도와 남해안 일대에 서식하는 천연기념물 215호다.
원시림이 내뿜는 숲의 기운 덕에 마음은 가벼웠지만 중력을 거스르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능선이 적고 가파른 비탈길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울릉도 특유의 경사진 지형 때문에 숨은 턱턱 막혔고, 산행에는 ‘네 발’(두 발과 등산 스틱을 쥔 두 팔)의 근육을 총동원해야 했다. 나리분지에서 성인봉까지 5시간10분이 걸렸다.
가파른 울릉도의 산은 내리막길도 험했다. 특히 장재에서 나리분지로 이어지는 1시간 남짓의 거리는 2~3배 더 길게 느껴졌다. 오후 4시52분, 손발은 수고스러워도 눈이 호강했던 이날의 하이킹을 마치고 다시 나리분지로 돌아왔다. 출발부터 도착까지 걸린 시간은 7시간42분. 하이킹에 참가한 임현정(30)씨는 “깃대봉에 오를 때만 해도 ‘이렇게 쉽게 가나?’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부터는 역시 쉽지 않았다. 울릉도의 속살을 제대로 맛본 것 같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임태완(33)씨는 “길이 잘 보이지 않는 풀숲을 헤쳐나가며 울릉도의 깊은 자연을 두 발로 느낄 수 있었고 성취감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울릉도/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그 섬에서 즐기는 아홉가지 걷기 여행
울릉도 하이킹 여행 정보
가는 방법
울릉도에는 3개의 항구(저동·도동·사동항)가 있다. 강원 강릉항, 동해 묵호항, 경북 울진 후포항, 포항항, 포항영일만신항에서 각각의 울릉도 항구를 목적지로 배가 출발한다. 강릉·동해·포항에서 출발하는 쾌속선은 2시간40분~3시간이 걸리고 울진에서 출발하는 쾌속선은 4시간30분이 걸린다. 크루즈선은 포항영일만신항에서 밤에 출발한다. 쾌속선과 크루즈선의 운임은 7만원 이상이고, 크루즈선은 로얄스위트룸의 경우 최고 80만원대까지 요금이 다양하다. 배편은 예약을 해야 하고, 배를 탈 때 신분증 지참은 필수다. 예약은 각 선사와 ‘가보고싶은섬’ 누리집, 앱에서 손쉽게 할 수 있다.
섬 교통편·숙박
울릉군 농어촌 버스, 렌터카, 관광버스 등을 이용할 수 있고 섬 일주 택시도 있다. 크루즈선에 차를 싣고 입도하는 것도 가능하다. 울릉도에는 호텔·펜션·민박·캠핑장 등 숙박시설이 많다. 울릉군 관광문화 누리집을 참고하면 된다.
하이킹 코스
소요시간과 난이도별로 총 9개의 ‘울릉 해담길’이 조성돼 있다.
1코스 도동-저동 해안산책로/길이 1.9㎞/소요시간: 60분/주요 볼거리: 행남등대, 해안지질/난이도: 중
2코스 도동-저동옛길/2.3㎞/80분/섬개야광나무, 저동항/중
3코스 내수전-석포옛길/6.7㎞/180분/내수전전망대, 안용복기념관/중상
4코스 죽암-윗대바우-천부옛길/4.5㎞/90분/윗대바우, 천부전망대/중
5-1코스 나리숲길-깃대봉-울릉천국아트센터/5.5㎞/180분/나리분지, 깃대봉/중상
5-2코스 나리숲길-용출소-깃대봉-울릉천국아트센터/5.2㎞/180분/평리마을/중상
6-1코스 울릉도·독도 해양과학기지-태하-학포/5.1㎞/130분/해양연구기지, 태하·학포마을/중상
6-2코스 태하모노레일종점-대풍감전망대-태하해안산책로/2.1㎞/100분/대풍감전망대, 태하해변/중
7코스 남양-태하/1.6㎞/60분/솔송나무, 섬잣나무, 너도밤나무 군락지/중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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