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농민군은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았다
이겸호·이인환·최동린·이백호
이겸호, 패전 뒤 ‘화승총’ 보관
이인환, 대포 다룬 야전사령관
‘소년 장수’ 최동린, 포탄 남기고
이백호, 51살에 봉기했다 ‘분살’
“할아버지가 석대들 전투에서 지고 부용산 절로 숨어들었제. 일본군 토벌대가 절을 수색했는디 주지스님이 절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할아버지 편을 들어줘서 간신히 살아남은 모양이야. 할아버지 형제들은 할아버지가 죽은 줄 알고 주검이라도 찾아보려 지게를 지고 절로 가니까 멀리서 작대기가 보였다고 하더라고. 할아버지가 끝까지 총을 버리지 않고 갖고 내려온 거제.”
지난 19일 전남 장흥군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만난 이겸호(1874~1957)의 손자 이정신(81) 전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은 기념관에 전시된 화승총을 가리키며 내막을 설명했다. 1m20㎝ 길이의 화승총은 나무 개머리판은 썩어 없어지고 총신만 남아 있었다. 화승총은 약 30년 전, 이 전 회장이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집을 고치다 발견했다.
장전에 1분…“죽음 각오하고 싸운 것”
이 전 회장은 “총을 들키면 역적 집안으로 몰려 변을 당할 수 있으나 할아버지가 처음엔 독에 숨겼다가 마루 밑으로 옮기셨다”며 “이후 가족들이 총에 대해 잊고 살다가 우연히 발견해 기증했다”고 전했다. 위의환 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은 “화승총은 장전하는 데만 1분이 걸리고 불이 잘 붙으면 80m, 덜 붙으면 40m가 나간다고 하는데 2㎞가 나가는 일본군 총에 상대가 되겠냐”며 “당시 동학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 것”이라고 했다.
이겸호는 장흥군 용산면에서 2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공직에 있었던 큰형을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챙겼다고 한다. 농민군이 장흥군 용산면에 주둔하자 형은 동생에게 쌀을 가져다주라고 했다. 몇차례 군량을 전달했던 이겸호는 음력 1894년 12월15일(양력 1895년 1월10일) 조일 연합군의 장흥 토벌 움직임이 보이자 쌀가마 대신 화승총을 들었다. 그가 농민군에 가담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 전 회장은 “혹시나 공직에 있는 형이 농민군들에게 해를 입을 수 있으니 집안을 지키려 쌀을 가져다주다가 자연스럽게 동학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겸호는 석대들에서 이틀간 치른 치열한 전투 끝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관군은 쓰러진 농민군의 눈꺼풀을 뒤집은 뒤 입으로 바람을 불어가며 사망 여부를 판단했는데 이겸호는 이를 참아냈다고 한다. 석대들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농민군은 2000여명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겸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동학에 대해선 함구한 채 조용히 살았다. 다만 그의 아들들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투신해 옥살이를 하는 등 고초를 겪으며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장흥기념관 이겸호의 화승총 옆에는 ‘13살 소년 장수’ 최동린(1881~1894)의 포탄도 전시돼 있었다. 어른 주먹보다 큰 크기에 붉은 녹이 슨 포탄은 5㎏ 무게의 둥그런 쇳덩이다. 동학혁명 당시 대포를 이용해 성문을 부수는 데 쓴 것으로 추정된다. 2009년 장흥에서 동학 115주년 기념행사가 열렸을 때 최동린의 조카로 양자가 된 최재호(97)씨가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걸 기증했다.
최동린이 어린 나이에 동학에 참여한 배경은 알려지지 않았다. 장흥 대흥면(현 대덕읍) 접주 이인환(1895년 사망)과 같은 마을에 살며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전해온다. 전투에서 말을 탔다는 기록과 나주 호남초토영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는 기록으로 미뤄 동학의 ‘주요 지휘자’로 꼽힌다. 최동린은 석대들 전투 패배 뒤 고읍면(현 관산읍) 옥산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피신했으나 주민 밀고로 체포돼 목숨을 잃었다.
이인환은 장흥 회령진성 수군 출신으로 대포를 능숙하게 다뤘다고 한다. 철광석 산지 장흥 관산읍에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제철소가 있어 강진 병영성, 해남 우수영, 장흥부 등에 포탄이나 각종 집기를 공급한 기록도 있다. 향토사학자들은 이인환 주도로 이곳에서 포탄을 만들면서 최동린의 집에도 일부를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
위 전 이사장은 “ 장흥 전투 총사령관이 이방언 장군이라면 이인환은 실질적인 야전사령관 ”이라며 “최동린의 포탄은 이겸호의 화승총과 더불어 농민군의 석대들 전투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 ”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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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처형
석대들 전투 뒤 붙잡힌 농민군들은 참수·총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당했지만 그중 분살(화형)은 가장 잔인한 방식이다. 장흥 용산면 집강(동학 자치기구인 집강소의 수장)으로 활동했던 이백호(1844~1895)는 최동린처럼 주민 밀고로 붙잡혀 분살당했다.
이방언과 6촌인 이백호는 51살이라는 늦은 나이 때 혁명의 최전선에 섰다. 이백호의 아버지는 장흥향교 향선생을 할 정도로 뿌리 깊은 유생 가문이었다. 하인과 소작인을 둘 정도로 재력도 있었다고 한다. 유생으로서 동학에 참여하기 쉽지 않았던 이백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3년상을 치른 뒤에야 입도했다. 이방언과 가까운 집안인데다 학식과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이백호는 책임자 지위에 올랐다.
이백호가 어떤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파악하기 어렵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유족 증언과 당시 정황을 종합해 그가 이방언 휘하에서 장흥 지역 각 전투에 참여했고, 음력 1894년 12월17일(양력 1895년 1월12일) 관산읍 옥산 전투에서 패하자 동료 2명과 장흥 안양면 모령리 처가로 피신했으나 주민 밀고로 붙잡힌 것으로 파악했다.
이백호의 분살 방식은 구체적인 증언이 남아 있다. 이백호의 손녀는 관군이 마을 앞 논에 말뚝을 박아 이백호와 동료들을 묶은 뒤 유지기(볏짚으로 만든 얼굴 가리개)를 씌워 불을 붙였다는 증언을 남겼다. 당시 가족들은 멀리서 분살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 관군들이 물러난 뒤에야 가족들은 이백호의 불탄 주검을 수습해 용산면 월림리 야산에 안장했다. 남은 가족들은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역적 집안으로 몰려 고향 마을에 살 수 없어 아는 사람이 없는 마을로 이사했다고 한다. 증손 이문갑씨는 “그때 집이 망해 후손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노동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었다”며 “그대로 모두 근면하게 지내며 욕심 없이 살았다”고 증언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동학혁명 당시 관군들이 피신한 농민군을 수색하며 못살게 구니까 주민 밀고가 자주 있었다”며 “장흥 지역 농민군 처형은 ‘분살’ 형태가 많았는데 이백호 관련 증언에서 상세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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