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사실 왼손잡이다? 왼손잡이 아미노산의 비밀을 찾아서
생명체 속 아미노산은 대부분 '왼손잡이'입니다. 화학물질이 왼손잡이라니 무슨 말인가 싶을 겁니다. 같은 화학물질이라도 분자구조가 다른 경우가 있어요. 이럴 때 각각을 '왼손잡이 물질'과 '오른손잡이 물질'로 구분해 부르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생명활동에 관여하는 화학물질은 대부분 왼손잡이 또는 오른손잡이 한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랜덤'할 것 같은 자연에는 어쩌다 이런 규칙이 생겼을까요.
잠시 잡지(또는 휴대전화나 컴퓨터)를 내려놓고 양손을 살펴봅시다. 왼손과 오른손은 서로 닮았습니다. 엄지손가락 한 개, 집게손가락 한 개, 중지, 약지도 한 개고요. 새끼손가락도 한 개입니다.
그런데 두 손이 완벽하게 똑같이 생기진 않았어요. 손등을 위로 뒀을 때 왼손은 시계방향으로 소지, 약지, 중지, 검지, 엄지 순으로 연결돼 있고 오른손은 시계방향으로 엄지, 검지, 중지, 약지, 그리고 소지 순압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처럼 구성 성분이 동일하지만 연결 방식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물질을 화학에선 '거울상 이성질체'라고 부릅니다. 서로 거울에 비춰보면 동일한 모양이지만 아무리 회전시켜도 겹칠 수 없는 물질이에요.
거울상 이성질체들은 무게나 끓는점, 녹는점, 환원성 등 물리·화학적 성질이 동일하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생체 내 작용은 다를 수 있어요. 이 때문에 왼손잡이 화학물질이 인체에서 약효를 보이는 한편 오른손잡이 화학물질은 독성을 보이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거울상 이성질체인 화학물질에서 중심 탄소를 기준으로 탄소에 연결된 작용기를 정렬할 때, 카복시기가 위쪽, 아미노기가 왼쪽인 경우를 편의상 '왼손잡이 화학물질'이라고 부릅니다.
● 왼손잡이 아미노산이 가득한 수프에서 태어난 우리
재미있는 건 생명체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울상 이성질체는 대부분 왼손잡이 또는 오른손잡이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겁니다. 이걸 '단일 카이랄성'이라고 불러요. 아미노산은 오른손잡이 물질보다 왼손잡이 물질이 더 많고, 당은 오른손잡이 물질이 더 많습니다.
어쩌다 생명은 왼손잡이 또는 오른손잡이를 콕 집어 선호하게 됐을까요. 생명체 밖에서 거울상 이성질체를 합성하면 대부분 왼손잡이 물질과 오른손잡이 물질의 비율이 비슷하게 생성되는데 말입니다.
도나 블랙몬드 미국 스크립스연구소 화학과 교수는 이 문제에 지속적으로 매달려온 연구자 중 하나입니다. 2024년 2월 블랙몬드 교수팀은 두 편의 논문을 통해 아미노산에서 발생하는 왼손잡이 물질 '편애'가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연구팀은 오늘날 생명체의 아미노산에서 왼손잡이 물질을 많이 찾아볼 수 있게 된 이유는 지구상에 처음 생명이 등장할때 왼손잡이 아미노산의 농도가 오른손잡이 아미노산보다 높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연구팀은 우선 아미노산을 생성하는 화학 반응인 '아미노기 전이반응(transamination)'을 살펴봤습니다. 복잡한 효소가 관여하지 않는 비교적 단순한 반응이라 생명체 탄생 초기부터 아미노산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꼽힙니다.
아미노기 전이반응은 쉽게 말해 아미노산의 핵심 요소인 '아미노기(-NH2)'를 붙여주는 과정입니다. 연구팀은 피루브산과 아미노기를 가지고 있는 분자인 피리독사민을 원시적 형태의아미노기 전이효소와 섞었습니다. 그러면 아미노기 전이효소가 피리독사민의 아미노기를 떼서 피루브산에 붙여주죠. 그 결과 아미노산의 일종인 알라닌이 생성되고 피리독사민은 피리독살이 됩니다.
반대 반응(역반응)도 동시에 이뤄집니다. 알라닌에서 다시 아미노기를 뗀 다음 피리독살에 붙여주는 거죠. 그럼 다시 피리독사민과 피루브산이 생성됩니다. 헷갈리다면 모자를 쓴 사람과 안쓴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서로 모자를 뺏고 뺏기길 반복하는 장면을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모자=아미노기'입니다.
피루브산과 피리독살이 아미노기 전이효소의 도움을 받아 아미노기를 뺏고 뺏기길 반복하는 사이 연구팀은 시시각각 바뀌는 왼손잡이 물질과 오른손잡이 물질의 비율에 주목했습니다. 피루브산에 아미노기를 붙이면 알라닌이 되는데, 알라닌은 거울상 이성질체입니다.
왼손잡이 알라닌(L-Ala)과 오른손잡이 알라닌(D-Ala)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알라닌에서 다시 아미노기를 떼 피루브산으로 돌려놓는 과정에서 오른손잡이 알라닌이 피루브산으로 돌아가는 속도가 왼손잡이 알라닌이 피루브산으로 돌아가는 속도보다 더 빨랐습니다.
이는 오른손잡이 알라닌이 '소진되는' 속도가 왼손잡이 알라닌보다 더 빨랐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왼손잡이 알라닌의 농도와 오른손잡이 알라닌의 농도 차가 생겨납니다. 왼손잡이 알라닌의 농도가 오른손잡이 알라닌보다 더 높아지는 거죠.
연구팀은 논문에서 "이 같은 원시적 화학반응은 생명체가 탄생한 시기에 왼손잡이 화학물질의 농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을 것"이라면서 "왼손잡이 화학물질의 농도가 높아진 환경에서 화학반응을 돕는 촉매는 점차 복잡한 형태로 진화해 가며 왼손잡이 화학물질에 더 잘 작용하도록 형태가 고정됐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연구결과는 2월 5일 국제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됐습니다. (doi: 10.1073/pnas.2315447121)
아미노산은 줄줄이 연결돼 폴리펩타이드를 형성합니다. 폴리펩타이드는 서로 얽히고설켜 단백질이 되죠. 연구팀은 이렇게 아미노산이 단백질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왼손잡이 아미노산과 오른손잡이 아미노산의 특성이 다르게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이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 왼손잡이 아미노산과 오른손잡이 아미노산을 섞은 다음 아미노산들이 서로 연결돼 폴리펩타이드를 형성하는 과정을 관찰했습니다.
왼손잡이 아미노산과 오른손잡이 아미노산은 일종의 '동족혐오' 경향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왼손잡이 아미노산의 연결 속도는 왼손잡이 아미노산과 연결될 때보다 오른손잡이 아미노산과 연결될 때 더 빨랐죠. 오른손잡이 아미노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결과 '왼손-오른손-왼손-오른손'과 같이 번갈아 연결된 폴리펩타이드가 더 많아졌습니다. 연구팀은 이렇게 번갈아 연결된 폴리펩타이드가 서로 쉽게 뭉친다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연구결과는 2월 28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됐습니다. (doi: 10.1038/s41586-024-07059-y)
논문 두 편의 내용을 연결해 보겠습니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처음 탄생하던 시기 첫 번째 논문이 제시한 대로 오른손잡이 아미노산이 빠르게 소진되며 왼손잡이 아미노산의 농도가 높아졌습니다. 계산을 쉽게 하기 위해 오른손잡이 아미노산이 20개, 왼손잡이 아미노산이 100개 남은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보겠습니다.
아미노산이 4개씩 뭉쳐 폴리펩타이드를 형성한다고 가정합시다. 두 번째 논문에 따르면 아미노산이 가장 선호하는 조합은 왼손-오른손-왼손-오른손 순으로 번갈아 연결되는 겁니다. 오른손잡이 아미노산 20개가 왼손잡이 아미노산 20개와 만나 폴리펩타이드 10개를 형성합니다. 그다음 서로 단단히 뭉쳐질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왼손잡이 아미노산 80개만 남죠.
이처럼 우리는 왼손잡이 아미노산이 그득한 환경에서 탄생하고 진화했습니다. 오늘날 생명체에 왼손잡이 아미노산이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블랙몬드 교수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연구를 통해 생명체에 왼손잡이 아미노산이 더 많이 분포하는 이유를 더욱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 왼손잡이 아미노산의 활성화에너지가 '9kcal' 낮은 이유
블랙몬드 교수가 왼손잡이 화학물질의 비밀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방법을 찾았다면 보다 근본적인 설명을 찾아 나선 과학자도 있습니다. 애초에 오른손잡이 화학물질과 왼손잡이 화학물질의 반응속도가 왜 다르냐는 거죠.
안도 타다시 일본 도쿄 이과대 응용전자공학과 교수와 타무라 코지 생명과학 및 공학과 교수는 왼손잡이 아미노산과 오른손잡이 아미노산이 생성될 때 필요한 활성화에너지를 정밀하게 계산한 결과 왼손잡이 아미노산의 활성화에너지가 더 낮았다는 연구 결과를 2023년 3월 국제학술지 '라이프(Life)'에 발표했습니다. (doi: 10.3390/life13030722)
생명체는 유전물질 속 정보를 토대로 아미노산을 조합해 폴리펩타이드를 만듭니다. 이 과정을 유전정보의 '번역'이라고 부릅니다. 유전정보가 번역돼 만들어진 폴리펩타이드는 이후 단백질이 됩니다.
단백질은 '생명현상의 근간'이라고 불리는 중요한 분자입니다. 그래서 유전정보의 번역은 생명현상의 중심원리(Central Dogma) 중 하나로 꼽히는 핵심 과정입니다.유전정보를 번역할 때 아미노산은 tRNA와 결합해야 합니다.
이 결합과정을 '아미노아실화'라고 합니다. 안도 교수는 보도자료에서 "오른손잡이 아미노산의 경우 아미노아실화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방해를 많이 겪으므로 생명체는 오른손잡이 아미노산보다 왼손잡이 아미노산을 선호한다는 내용의 선행 연구는 많았다"면서 "그러나 이 부분을 충분히 설명한 연구는 없었다"고 짚었습니다.
연구팀은 오른손잡이 알라닌과 왼손잡이 알라닌이 아미노아실화 반응을 겪을 때 필요한 활성화에너지를 각각 계산했습니다. 활성화에너지는 화학반응이 진행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말합니다.
슈뢰딩거 방정식과 뉴턴 역학을 접목한 'MD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활성화에너지를 계산한 결과 오른손잡이 알라닌의 활성화에너지는 1mol(몰)당 26.2kcal(킬로칼로리), 왼손잡이 알라닌의 활성화에너지는 1mol당 17kcal로 나타났습니다.
활성화에너지가 높을수록 화학반응이 진행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크고 화학반응이 진행되는 속도는 낮아집니다. 활성화에너지가 낮은 왼손잡이 알라닌이 훨씬 더 빠르고 쉽게 아미노아실화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생명체가 왼손잡이 아미노산을 선호하게 된 배경에는 왼손잡이 아미노산이 더 '쉬운' 선택지인 점 또한 중요하게 작용했던 겁니다.
● 스핑크스 타일'이 보여주는 단일 카이랄성의 비밀
그렉 휴버 미국 챈 저커버그 바이오허브 샌프란시스코 연구원팀은 '스핑크스 타일'을 이용해 자연계가 '단일 카이랄성'을 선호하는 이유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했다. 스핑크스 타일에는 서로 대칭인 왼손잡이(L)-스핑크스와 오른손잡이(R)-스핑크스 두 종류가있다.
연구팀은 작은 스핑크스 타일 528개를 배열해 '23차 스핑크스'를 만들 때 전체 에너지(무질서도)를 분석했다. 전체 에너지가 낮을수록 스핑크스 타일의 배열이 규칙적이다. 분석 결과 대부분 L-스핑크스로만 구성돼 있었던 23차 스핑크스의 전체 에너지를 높이자 R-스핑크스 수가 점차 늘어났다.
연구팀은 "한 종류의 이성질체로만 구성돼 있을 때가 에너지가 가장 낮아 안정적"이라고 해석했다. 연구 결과는 3월 4일 국제학술지 '피지컬 리뷰 리서치'에 발표됐다. (doi:10.1103/PhysRevResearch.6.013227)
● '신은 왼손잡이'일 리 없기에 과학은 성장한다
왼손잡이 아미노산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생명의 근원까지 거슬러 갔습니다.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을 동원해 활성화에너지도 계산했어요. 언뜻 생각하면 '생명체가 왼손잡이 화학물질을 편애하든, 오른손잡이 화학물질을 편애하든 이유가 뭐가 중요할까'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대칭적이지 않다는 것, 한쪽에 치우친 경향성이 존재한다는 건 과학자들에겐 무척 신경 쓰이는 대목입니다. 생물학뿐 아니라 과학 전반에서도 그렇습니다
"난 신이 약간 왼손잡이라는 이들의 주장을 믿을 수 없네. 이실험이 대칭적인 결과를 얻는다는 데 대해 큰돈을 걸 준비가 돼 있네."
오스트리아의 이론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파울리가 말한 '이들'은 중국의 이론 물리학자 양전닝과 리정다오를 말합니다. 두 사람은 우주의 물리 현상이 대칭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의 이론을 1956년 발표했습니다.
당시 물리학자들은 우주 전체를 거울에 비춰봤을 때 현실 속 물리현상과 거울 속 물리현상이 동일한 'P 대칭'이 유지될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전닝과 리정다오가 P 대칭이 깨질 수 있다는 이론과 이를 입증할 실험방법을 함께 제시한 겁니다. 물리학계 전체가 술렁거렸습니다.
이듬해 파울리의 호언장담은 아주 빗나갔음이 입증됐습니다. 우젠슝 당시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1957년 P 대칭 깨어짐을 실험을 통해 증명하는 데 성공합니다. 코발트(Co)-60 원자가붕괴하면서 방출한 전자의 스핀 패턴을 봤더니 왼쪽으로 회전하는 전자의 수가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전자의 수보다 많았던거죠. 왼손잡이 전자와 오른손잡이 전자의 수가 다르니 이 현상에선 P 대칭이 깨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P 대칭 깨어짐이 입증됐으니 물리학계는 신은 왼손잡이란 사실을 인정했을까요. 아니요. 당시 과학자들은 우주의 '절대적인 대칭'을 설명할 이론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저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할 뿐이라고요. 우주가 비대칭적일 리 없으니 국소적인 비대칭을 설명할 더 큰 이론을 찾아 나서는 식이죠.
이 과정을 통해 현재 인류가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가장 근본적인 이론인 '표준모형'이나 그 너머의 초대칭이론 등이 탄생했습니다. '그럴 리 없는데?'라는 과학자들의 찝찝함이 과학의 발전을 이룬 겁니다.
생물학에서 발견되는 왼손잡이 화학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근본을 찾다 보면 생명체 탄생 초기 환경이 어땠는지 생명체 내의 화학반응이 어떤 기본 원리를 통해 이뤄지는지 살펴볼수 있습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고 우주는 이유 없는 편애를 하지 않는다는 믿음. 이걸 토대로 과학이 점차 성장했습니다. 어쩌면 왼손잡이 아미노산의 비밀 뒤편에도 아직 우리가 밝히지못한 우주의 비밀이 숨어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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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기자 leci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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