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춘부까지 회계고수라는 이 나라...초강대국 꺾은 기적 일궜다? [히코노미]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7. 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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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노미-2] 계란으로 바위치기로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메추리알로 거석치기 정도는 돼야 마땅합니다. 조그만 소국이 세계적인 대국과 한 판 붙어보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16세기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스페인과 ‘맞짱’을 뜬 소국 네덜란드의 이야기입니다.

역전극은 언제나 짜릿하기 마련입니다. 네덜란드는 결국 거함 스페인을 무너뜨리며 독립을 쟁취합니다. 이 작디작은 나라가 대제국에 맞설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학자들은 ‘회계’를 꼽습니다. 재무 정보를 총괄하는 회계에 대한 지력이 ‘작지만 큰나라’를 만든 근간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도대체 회계에 어떤 힘이 숨어있길래.

국토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은 네덜란드의 오늘날 모습은 인간의 위대함을 방증한다. 암스테르담 전경. [사진출처=Andrés Barrios]
회계의 나라 네덜란드, 무역의 중심이 되다
“상업 국가에서 회계는 왕이다.”

네덜란드에서는 모두가 숫자에 통달합니다. 저잣거리 상인부터, 국가 지도자까지 자금의 흐름을 기록하는 데 능숙합니다. 매춘부까지도 회계 장부 작성에 탁월하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네덜란드가 북해 무역의 중심지로 거듭난 뒤부터입니다. 지중해 무역의 강자 피렌체의 상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네덜란드 도시 안트베르펀(현재 벨기에 안트베르펜)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다.”

“1등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셈이 밝아야 합니다.” 네덜란드 화가 퀀틴 마시스의 ‘환전상과 그의 아내’. (1514년 작품)
유럽 각국에서 흘러들어온 향신료와 청어를 비롯한 음식물까지. 네덜란드에는 돈과 물산이 넘쳐났습니다. 시민들은 부(富)를 지키는 데도 탁월했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복식부기’를 장려했기 때문입니다. 복식부기는 단순히 현금흐름을 일회성으로 기록하는 단식부기와 달리 거래를 두 번씩 적습니다.

자산과 부채, 자본, 비용, 수익을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 어떻게 돈이 들어왔고 어디로 흘러나갔는지가 명료합니다. 재정을 관리하는 데 탁월한 기록법인 셈입니다. 네덜란드에는 수많은 회계학교가 존재했습니다. 레이던, 델프트, 하우다, 로테르담, 위트레흐트 등 전역에 걸쳐서였습니다. 들어오는 부가 흥청망청 쓰이지 않은 배경입니다.

“자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물건이 아닙니다.” 항구에서 물품을 싣는 네덜란드 선박.
네덜란드는 왜 회계에 집착했나
“정확하지 않으면, 우린 모두 죽음 목숨이네.”

네덜란드가 회계적 수학에 깊이 관여된 이유가 있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스며든 삶의 태도 덕분입니다. 네덜란드 땅은 ‘저지대’로 영토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입니다. 수로와 관시설, 제방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나라였지요. 조금이라도 허술하게 작업이 진행될 경우 네덜란드 땅 전체가 바닷물에 잠길 수도 있었습니다.

꼼꼼한 공사, 이를 철저히 관리 감독하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어느 나라보다도 컸던 것이지요. 공사에 쓰일 시민들의 세금이 조금이라도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회계 공부도 장려합니다. 척박한 영토라는 시련이, 네덜란드 시민을 단련시킨 셈입니다.

17세기 화가 제이콥 반 루이스달의 ‘하를렘 전경’. 네덜란드 인이 간척한 드넓은 평야를 보여준다.
회계의 중요성을 지도자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17세기 지배자 마우리츠 공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사생아 출신인 시몬 스테빈을 자신의 최측근으로 뒀습니다. 그가 공학과 상업의 최고 지성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스테빈은 수학을 통치로 연결할 줄 아는 학자였지요.

그는 시 행정에 있어서도 복식부기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군주를 위한 회계’라는 참고서적을 썼을 정도입니다. 마우리츠 공은 그를 신뢰해 제방감찰관 및 네덜란드 육군의 최고 행정관으로 임명합니다. 네덜란드는 점점 몸집이 커지고 있었지요.

“자 모두 회계를 공부하세.” 네덜란드의 지도자면서 회계를 강조한 마우리츠 공.
부유해지는 네덜란드...그걸 지켜보는 스페인
황금알을 낳는 거위 옆에는 항상 욕심쟁이 주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악당은 네덜란드를 지배한 합스부르크가 가문.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스페인·이탈리아북부·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네덜란드까지 지배하는 가문이었습니다. 수장 펠리페2세는 항상 검은옷을 입고, 미사를 드리며, 전 세계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서류에 서명하느라 바빴습니다.

제국은 언제나 ‘고비용’의 정치체제입니다.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때로 더 많을 때도 있었지요. 돈은 늘 부족했고, 언제나 부채에 허덕였습니다.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에서 지속적으로 과세를 강화해 온 배경입니다.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는 것이 부담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독실한 가톨릭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금을 더, 더, 더 내란 말이야.” 네덜란드 오렌지 공작을 꾸짖는 펠리페2세.
‘이교도’를 벌주는 데 세금만큼 좋은 처벌은 없었지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개종’을 강요합니다. 펠리페 2세의 말입니다. “네덜란드인들이 개신교로 남게 하느니, 차라리 나의 왕국 전체를 잃는 게 낫다.” 네덜란드 당국은 국민들에게 ‘종신연금’을 강제해 그 돈을 스페인으로 보냈습니다. 시민들 마음속에는 스페인에 대한 분노가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지도자 오렌지 공의 결단
“압제자 스페인 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섭니다. 1568년 네덜란드 북부 개신교 지역 7개 주가 중심이었습니다(가톨릭을 믿는 네덜란드 남부 지방은 훗날 벨기에로 분열합니다) 돈과 자유를 모두 빼앗으려는 군주를 더 이상 모시지 않겠다는 선언.

죽을지언정 자유인으로 죽겠다는 결기가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중심에 선 남자가 바로 ‘침묵공’ 빌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렌지 공작 윌리엄(빌럼의 영어식 발음)으로도 유명하지요. 전술한 마우리츠 공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스페인 냄새 나는 건 다 부숴버려.” 네덜란드 시민은 스페인의 가톨릭 강요에 분노해 성당의 성상파괴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성상’을 가톨릭적 우상숭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윌리엄이 네덜란드의 귀족이 된 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프랑스 남부 오랑쥬 지역을 다스리던 사촌 르네 드 샬이 후사 없이 죽자, 윌리엄이 이 대영지를 상속받았지요. 프랑스 오랑쥬와 네덜란드·벨기에를 아우르는 땅. 그를 오렌지(오랑쥬의 영어식 발음. 네덜란드어로는 오라) 공작으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물론 합스부르크 제국에 충성을 다한다는 조건에서였습니다.

(여기서 오랑쥬는 켈트 신화 속 물의 여신의 이름을 딴 지명으로 과일 오렌지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후대 네덜란드인들이 동음이의어인 것에 착안해 ‘오렌지’색으로 국가의 상징을 만든 것이지요.)

윌리엄은 가톨릭이었지만, 개신교에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믿음이 다르다고 시민을 죽이는 건 있을 수 없었지요. 그가 합스부르크와 전쟁에 선봉에 나선 배경입니다. 반개신교 정책을 강요하는 펠리페 2세에 반대하며 그는 외쳤습니다. “나는 가톨릭교도지만, 군주가 신민의 영혼을 빼앗고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찬성할 순 없다.”

“우리 오렌지의 단맛, 아니 쓴맛을 보여주마”. 오렌지 공작 윌리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시작...그리고 은행의 탄생
인구 1500만의 합스부르크 제국과 100만의 네덜란드의 전쟁이 시작이었습니다. 스페인 제국 군대가 네덜란드의 핵심 무역 도시 안트베르펀을 공격하면서 부유한 장인들과 상인들이 모두 북부 도시로 대규모 피난길에 오릅니다. 네덜란드의 중심이 암스테르담으로 바뀌게 된 경위입니다. 다른 말로 암스테르담이 세계 제일의 무역도시가 되었다는 의미였습니다.

1581년 네덜란드는 황제를 패배시키고 공화국임을 천명합니다(우리네 삶은 동화가 아니기에, 지지부진한 전쟁은 1648년까지 계속됩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80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스페인 물건 빼고는 전 세계 것 다 있어요.” 1656년 암스테르담. 이곳은 세계적 무역 중심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의 경제 주권을 지킬 은행을 설립한다.”

네덜란드는 진정 위기에서 배울 줄 아는 국가였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에서 성공한 뒤 암스테르담 시 주도하에 공공은행을 설립합니다. 1609년 1월 ‘암스테르담 은행’의 등장이었습니다. 오늘날 중앙은행의 기원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들의 목적은 뚜렷합니다. 네덜란드 통화의 가치하락을 지키자는 것. 스페인의 세금 착취로 동전 주조량이 급증하면서 통화 가치가 떨어지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감히 식민지가 반란을 일으켜?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를 공격하는 스페인 군대. 네덜란드 화가 요한 야콥 비크의 작품.
독립 후 처음으로 발행한 라이크스달더에 약 25g의 순은을 정확하게 넣어 주조합니다. 가치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전까지 동전 금속 함유량은 권력에 의해 자주 변해왔습니다. 회계사 네명이 달라붙어 철저한 관리 속에 운영됐지요. 비트코인이 중앙권력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며 태동했듯, 암스테르담 은행 역시 제국 권력으로부터 탈주를 목표로 삼았지요.
아시아 무역 확장에 나선 네덜란드
금융은 경제 혈관의 핵심입니다. 암스테르담 은행 기반 아래 네덜란드 상인들은 세계로 뻗어나갈 동력을 얻었지요.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부터 네덜란드 상인들은 스페인·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무역 루트를 하나하나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암스테르담 은행을 묘사한 그림.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기관의 지원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성장할 수 있었다.
코르넬리스 드 호우트만, 야콥 판 넥 등 거물 상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의 경제 영토를 넓혀갔지요. 인도네시아에는 오늘날의 ‘금’과 같은 가치가 있는 향신료 후추의 항구인 반템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꾸준히 많은 함대를 가지고 인도네시아를 두들겼지요.

제국주의의 초기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선원이 죽기도 했지만 400%가 넘는 이익이 돌아오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사업. 인도네시아에 직접 출항하는 함대는 늘어만 갔습니다.

“우리 힘을 합치는 게 어떻겠나.”

셈에 밝은 네덜란드 상인들은 현재 상황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무역 회사들은 단일 항해 기간 자금을 조달하고, 함대가 후추를 가득 싣고 돌아오면 청산하는 구조였습니다. 안전하게 ‘금의환향’하면 대박이 보장되지만, 해적을 만난다거나, 배가 난파하거나 하면 회사는 파산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위험은 관리되어야 했고, 네덜란드는 통 큰 결단을 내립니다. “인도네시아로 무역하는 회사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무역 독점권을 부여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탄생이었습니다. 오늘날 최초의 주식회사 중 하나로 꼽히는 조직이지요.

“이곳이 네덜란드 국부의 원천이라네.” 1665년 인도 벵골에 자리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공장을 묘사한 그림.
유럽의 소국에서 세계적 상업제국으로
“회사가 잘 사는 게 국민이 잘 사는 길.”

위험은 분산되고, 수익은 안정화의 길로 들어섭니다. 때때로 포르투갈 무역선을 나포해 자산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브라질 목재, 아시아 작물, 북극 고래를 거래하는 명실상부 세계적 무역 기업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VOC의 주식을 살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합니다. 주주들끼리 서로 주식을 교환할 수 있는 시장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도 문을 열었지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적 증권시장 중 하나입니다.

“엔비디아 샀어?” “아니 동인도회사 샀는데” 1670년대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안뜰. 이곳에서 동인도회사 주식이 거래됐다.
일본이 일찍부터 서구문명을 일부 경험할 수 있던 것도 1640년대 네덜란드 상인들로부터였습니다. 이제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어느 나라도 무시 못할 강국으로 거듭나고 있었지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스페인-합스부르크 제국은 어떻게 됐냐고요. 파산을 선언합니다. 그에게 돈을 댔던 수 많은 은행가들 역시 문을 닫게 됐다는 의미지요.
“저기 낯선 배가 들어오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박이 나가사키를 향해 운항하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는 독일인 필립 프란츠 폴 지볼트. 가와하라 케이카 작품.
17세기 네덜란드는 황금기로 불립니다. 경제가 성장하자 정치가 튼튼해지고 예술이 그 찬란함 속에서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요하네스 베르메르, ‘야경’의 램브란트, 철학자 스피노자도 이 시기를 빛낸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1662년 자유시장 공화주의 이론가 피터 드 라쿠라는 네덜란드의 비결을 이렇게 꼽았습니다.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윤리와 역사 뿐만 아니라 수학·회계학·상업과 무역에 능통해야 한다.”

오늘날 이념싸움에 매몰된 우리네 정치인들이 아로새겨야 할 금언이 아닐는지. 여의도는 여전히 정치적 소음으로 소란합니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는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탄생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걸작이다.
<네줄요약>

ㅇ약소국 네덜란드는 대제국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했다.

ㅇ경제사학자들은 네덜란드 시민이 회계를 강조해 국부를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ㅇ재무적 지식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시작으로 최초의 주식회사격인 ‘동인도회사’, 중앙은행 격인 ‘암스테르담 은행’, 주식 거래소인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가 출범했다.

ㅇ수학과 경제적 지식은 국부의 원천인 셈이다.

<참고문헌>

ㅇ제이컵 솔,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하는가, 메멘토, 2014년

‘경제’는 맛보기에 어려운 식재료입니다. 채권, 이자, 화폐라는 단어만 들어도 쓴맛이 올라옵니다. 맛있게 즐기려면 ‘역사’라는 양념이 필요합니다. 히스토리와 경제를 결합한 연재물 ‘히코노미’는 먹음직한 요리를 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격주로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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