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춘부까지 회계고수라는 이 나라...초강대국 꺾은 기적 일궜다? [히코노미]
[히코노미-2] 계란으로 바위치기로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메추리알로 거석치기 정도는 돼야 마땅합니다. 조그만 소국이 세계적인 대국과 한 판 붙어보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16세기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스페인과 ‘맞짱’을 뜬 소국 네덜란드의 이야기입니다.
역전극은 언제나 짜릿하기 마련입니다. 네덜란드는 결국 거함 스페인을 무너뜨리며 독립을 쟁취합니다. 이 작디작은 나라가 대제국에 맞설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학자들은 ‘회계’를 꼽습니다. 재무 정보를 총괄하는 회계에 대한 지력이 ‘작지만 큰나라’를 만든 근간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도대체 회계에 어떤 힘이 숨어있길래.
네덜란드에서는 모두가 숫자에 통달합니다. 저잣거리 상인부터, 국가 지도자까지 자금의 흐름을 기록하는 데 능숙합니다. 매춘부까지도 회계 장부 작성에 탁월하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네덜란드가 북해 무역의 중심지로 거듭난 뒤부터입니다. 지중해 무역의 강자 피렌체의 상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네덜란드 도시 안트베르펀(현재 벨기에 안트베르펜)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다.”
자산과 부채, 자본, 비용, 수익을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 어떻게 돈이 들어왔고 어디로 흘러나갔는지가 명료합니다. 재정을 관리하는 데 탁월한 기록법인 셈입니다. 네덜란드에는 수많은 회계학교가 존재했습니다. 레이던, 델프트, 하우다, 로테르담, 위트레흐트 등 전역에 걸쳐서였습니다. 들어오는 부가 흥청망청 쓰이지 않은 배경입니다.
네덜란드가 회계적 수학에 깊이 관여된 이유가 있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스며든 삶의 태도 덕분입니다. 네덜란드 땅은 ‘저지대’로 영토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입니다. 수로와 관시설, 제방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나라였지요. 조금이라도 허술하게 작업이 진행될 경우 네덜란드 땅 전체가 바닷물에 잠길 수도 있었습니다.
꼼꼼한 공사, 이를 철저히 관리 감독하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어느 나라보다도 컸던 것이지요. 공사에 쓰일 시민들의 세금이 조금이라도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회계 공부도 장려합니다. 척박한 영토라는 시련이, 네덜란드 시민을 단련시킨 셈입니다.
그는 시 행정에 있어서도 복식부기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군주를 위한 회계’라는 참고서적을 썼을 정도입니다. 마우리츠 공은 그를 신뢰해 제방감찰관 및 네덜란드 육군의 최고 행정관으로 임명합니다. 네덜란드는 점점 몸집이 커지고 있었지요.
제국은 언제나 ‘고비용’의 정치체제입니다.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때로 더 많을 때도 있었지요. 돈은 늘 부족했고, 언제나 부채에 허덕였습니다.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에서 지속적으로 과세를 강화해 온 배경입니다.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는 것이 부담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독실한 가톨릭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섭니다. 1568년 네덜란드 북부 개신교 지역 7개 주가 중심이었습니다(가톨릭을 믿는 네덜란드 남부 지방은 훗날 벨기에로 분열합니다) 돈과 자유를 모두 빼앗으려는 군주를 더 이상 모시지 않겠다는 선언.
죽을지언정 자유인으로 죽겠다는 결기가 차 있었습니다. 그들의 중심에 선 남자가 바로 ‘침묵공’ 빌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렌지 공작 윌리엄(빌럼의 영어식 발음)으로도 유명하지요. 전술한 마우리츠 공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오랑쥬는 켈트 신화 속 물의 여신의 이름을 딴 지명으로 과일 오렌지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후대 네덜란드인들이 동음이의어인 것에 착안해 ‘오렌지’색으로 국가의 상징을 만든 것이지요.)
윌리엄은 가톨릭이었지만, 개신교에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믿음이 다르다고 시민을 죽이는 건 있을 수 없었지요. 그가 합스부르크와 전쟁에 선봉에 나선 배경입니다. 반개신교 정책을 강요하는 펠리페 2세에 반대하며 그는 외쳤습니다. “나는 가톨릭교도지만, 군주가 신민의 영혼을 빼앗고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찬성할 순 없다.”
1581년 네덜란드는 황제를 패배시키고 공화국임을 천명합니다(우리네 삶은 동화가 아니기에, 지지부진한 전쟁은 1648년까지 계속됩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80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네덜란드는 진정 위기에서 배울 줄 아는 국가였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에서 성공한 뒤 암스테르담 시 주도하에 공공은행을 설립합니다. 1609년 1월 ‘암스테르담 은행’의 등장이었습니다. 오늘날 중앙은행의 기원이라고도 불립니다. 이들의 목적은 뚜렷합니다. 네덜란드 통화의 가치하락을 지키자는 것. 스페인의 세금 착취로 동전 주조량이 급증하면서 통화 가치가 떨어지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제국주의의 초기 모습이었습니다. 많은 선원이 죽기도 했지만 400%가 넘는 이익이 돌아오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사업. 인도네시아에 직접 출항하는 함대는 늘어만 갔습니다.
“우리 힘을 합치는 게 어떻겠나.”
셈에 밝은 네덜란드 상인들은 현재 상황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무역 회사들은 단일 항해 기간 자금을 조달하고, 함대가 후추를 가득 싣고 돌아오면 청산하는 구조였습니다. 안전하게 ‘금의환향’하면 대박이 보장되지만, 해적을 만난다거나, 배가 난파하거나 하면 회사는 파산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위험은 관리되어야 했고, 네덜란드는 통 큰 결단을 내립니다. “인도네시아로 무역하는 회사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무역 독점권을 부여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탄생이었습니다. 오늘날 최초의 주식회사 중 하나로 꼽히는 조직이지요.
위험은 분산되고, 수익은 안정화의 길로 들어섭니다. 때때로 포르투갈 무역선을 나포해 자산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브라질 목재, 아시아 작물, 북극 고래를 거래하는 명실상부 세계적 무역 기업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VOC의 주식을 살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합니다. 주주들끼리 서로 주식을 교환할 수 있는 시장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도 문을 열었지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적 증권시장 중 하나입니다.
1662년 자유시장 공화주의 이론가 피터 드 라쿠라는 네덜란드의 비결을 이렇게 꼽았습니다.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윤리와 역사 뿐만 아니라 수학·회계학·상업과 무역에 능통해야 한다.”
오늘날 이념싸움에 매몰된 우리네 정치인들이 아로새겨야 할 금언이 아닐는지. 여의도는 여전히 정치적 소음으로 소란합니다.
ㅇ약소국 네덜란드는 대제국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했다.
ㅇ경제사학자들은 네덜란드 시민이 회계를 강조해 국부를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ㅇ재무적 지식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시작으로 최초의 주식회사격인 ‘동인도회사’, 중앙은행 격인 ‘암스테르담 은행’, 주식 거래소인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가 출범했다.
ㅇ수학과 경제적 지식은 국부의 원천인 셈이다.
<참고문헌>
ㅇ제이컵 솔,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하는가, 메멘토,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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