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 사람들] ⑥"북한이 황강댐 방류해 인삼밭이 물바다로 변했었죠"
북한 이슈 때문에 일 중단하기도…기후변화 대응은 새로운 과제
[※ 편집자 주 = 비무장지대(DMZ) 남쪽에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이 설정된 지 올해로 70년이 됐습니다. 민통선을 넘는 것은 군사적인 목적에서 엄격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민통선을 넘나들며 생활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기획 기사 10꼭지를 매주 토요일 송고합니다.]
(파주=연합뉴스) 권숙희 기자 = "인삼밭이 물에 완전히 잠겨서 하우스 지붕만 보였었어요. 5억을 들인 6년짜리 농사가 한순간에 날아갔죠."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이달 15일 경기 파주시 적성면의 한 인삼밭에서 만난 전명수(47) 파주개성인삼연구회 회장은 자연스레 그날의 기억을 꺼내 보였다.
2020년 8월 초 북한의 황강댐 방류로 파주 저지대 지역이 침수됐을 때 대규모 피해를 겪었던 전씨는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너무나도 허탈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가 파주 민통선·접경지역 일대에서 반평생 인삼 농사를 지어온 이래 가장 큰 좌절이었다.
밭인지 강인지 구별이 안 될 만큼 흙탕물이 가득한 당시의 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주는 전 회장의 손이 살짝 떨려 보였다.
전씨는 "처음에 무릎 정도로 물이 차길래 인삼이 썩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물 빠지는 걸 지켜보려고 했다"면서 "그런데 며칠 뒤 북한은 예고도 없이 물을 또 내려보냈고 아예 물바다가 됐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도 평소에는 별로 의식하지 못했던 분단의 현실을 그때는 크게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말 이후 토질과 기후가 우수하다는 개성지방 일대에서 재배돼 이름이 난 '개성인삼'은 DMZ(비무장지대) 이남에서는 민통선 마을이 있는 파주 장단반도 일대가 주산지다.
이 지역에서 나는 인삼을 특별히 '파주개성인삼'으로 명명해 파주시는 '파주개성인삼축제'를 2005년 처음 개최했다. 이제는 매해 60만명이 찾는 축제가 됐는데 지난해부터 전씨는 축제 추진위원장도 맡고 있다.
인삼을 20년간 재배해온 베테랑 농부인 전씨는 다른 농사꾼들이 으레 그러하듯 땅과 기후에 무척 민감하다.
특히 인삼은 기온과 습도, 바람에 유독 예민한 작물이다. 봄에 씨앗 뿌리고 여름내 키워 가을걷이하는 보통의 농작물과 달리 인삼은 최소 4년 이상 자란 뒤 수확해야 상품의 가치가 있는데, 파주개성인삼은 6년근만 취급한다.
그는 "내가 키운 인삼은 국내 최고 청정지역에서 6년을 재배했다는 자부심이 있다"면서 "예상치 못한 물난리도 겪어봤지만, 그때부터는 지대가 높은 땅을 찾는 노하우가 생겼고 잘 버티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현재 민통선 마을인 장단군 군내면에서 5천 칸(평), 민통선 바깥 지역에서 1만5천 칸(평)의 인삼 농사를 짓고 있다.
인삼 재배는 6년 농사가 끝나면 지력 소모와 세균 번식 등의 문제로 땅을 옮겨야 해서 그에게는 '좋은 땅 빌리기'부터가 농사의 시작이다.
그렇다 보니 "누가 이번에 괜찮은 땅 임대를 내놨더라"는 얘기만 들리면 민통선 마을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닌 그다.
사실 토질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민통선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여러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우선, 일일이 신원확인을 하는 군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민통선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수확 철 등 일손이 많이 필요해 일꾼들을 데리고 들어갈 때는 출입 절차에만 1시간 이상 소요되기도 한다.
전씨는 "외국인 일꾼이라도 있게 되면 여권 비자까지 다 맡겨야 하니 여간 번거롭지 않다"면서 "그래도 농사꾼에게는 좋은 땅이 우선이고, 청정지역인 민통선 마을에는 인삼 도둑도 없지 않겠느냐"며 웃어 보였다.
또 영농인에게 발급된 상시 출입증을 갖고 있어도 민통선 마을 거주자가 아니기에 일출 이전이나 일몰 이후에는 출입할 수 없다는 점도 불편 요소 중 하나다.
북한 관련 이슈가 갑자기 생겨 그 자리에서 밭일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더러 있다.
2020년 6월 북한이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할 당시에도 민통선 마을 안에서 농사 일을 하고 있었던 그는 연락받자마자 차를 몰아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은 남북 관계보다 기후 변화가 농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됐다.
지난 17일 파주지역에 시간당 최대 100㎜의 폭우가 퍼부어 전씨네 밭 약 300 칸(평)도 물에 잠기는 피해를 봤다.
여름철 초고온 현상과 국지적 '극한 호우'가 잦아지다 보니 이를 이겨내기 위한 새로운 기술에도 계속 관심을 갖게 된다고 한다.
그가 올해부터 자신의 밭에 도입했다는 '대형 하우스'에 들어가 보니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바깥과 달리 약간의 서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어두운 차광망을 기존 하우스들보다 훨씬 높이 설치하고, 양옆에선 바람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덕이다.
전씨는 "매년 기온이 더 뜨거워지는 기후변화가 체감되면서 농사도 점점 과학이 된다"면서 "대형 하우스는 바깥보다 평균온도가 3∼5도가량 낮은데, 이 정도면 작물을 재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수준의 온도 차"라고 설명했다.
20년간 자나 깨나 인삼만 생각해온 그는 "농산물 재배 지역의 위도가 점점 올라가고 있는데, 북한 개성은 어떨지 궁금하다"며 "순수한 농사꾼의 호기심으로 개성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도 했다.
전씨는 "어느 날 구글의 위성사진 프로그램으로 북한 개성지역을 들여다보게 됐는데, 우리와 똑같이 인삼 재배용 하우스를 지어놓은 게 보이더라"면서 "해가 드는 방향과 해를 막아주는 방향에 맞춰 설치된 차광망이 우리 것과 같아서 참 신기했다"고 귀띔했다.
북한에서 대남 풍선을 살포하고, 우리는 대북 확성기 방송을 하는 등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2024년의 상황에서는 요원해 보이는 얘기 같아도, 불과 16년 전인 2008년 금강산·개성 관광이 활발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작은 소망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닌 듯했다.
suk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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