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의 정체는 감독님…색감의 천재일까 변태일까[허진무의 호달달]
영화를 사랑하고, 특히 호러 영화를 사랑하는 기자가 ‘호달달’ 떨며 즐긴 명작들을 소개합니다. 격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
딥 레드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
출연 데이비드 헤밍스, 다리아 니콜로디, 가브리엘 라비아, 마샤 메릴
상영시간 127분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이름을 들으면 바로 머릿속에 검은색 가죽 장갑이 떠오른다. 아르젠토의 ‘지알로’ 영화들에 등장하는 살인마들이 대부분 장갑을 꼈기 때문이다. 지알로는 이탈리아어로 노란색인데 영화 용어로는 이탈리아의 독특한 호러 영화들을 말한다. 잔혹한 살해 장면, 화려한 미장센과 음악이 지알로의 특징이다. 루치오 풀치, 마리오 바바, 미셸 소아비 등의 지알로 대가들이 많지만 단연 다리오 아르젠토가 ‘지알로의 제왕’이라고 생각한다.
스무살이 갓 넘은 시절 아르젠토의 영화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당시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가 없던 시절이라 디지털 비디오 디스크(DVD)를 하나씩 모아 컴퓨터 화면으로 봤다. 조악한 화질과 엉성한 자막이었지만 영화의 마력적인 에너지는 젊은이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아르젠토 영화 중에선 발레 학교가 배경인 마녀 이야기 <서스페리아>(1977)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르젠토의 진수, 그리고 지알로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영화로 <딥 레드>(1975)를 첫손에 꼽는다.
<딥 레드>는 시작한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살인을 보여준다. 몽환적인 동요 가락을 찢어버리는 비명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하는 그림자가 벽에 비친다. 피 묻은 흉기가 바닥에 나뒹군다. 흰 양말에 검은 구두를 신은 아이의 발이 흉기 앞으로 다가간다. 바로 화면이 암전되면서 <딥 레드>라는 제목이 뜨고 이탈리아 록밴드 ‘고블린’의 음악이 흐른다. 비명이 동요와 이상하게 어울려 환청처럼 귓속에서 오래 메아리친다.
카메라는 주인공인 영국인 재즈 피아니스트 마커스(데이비드 헤밍스)를 비춘다.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한 마커스는 길거리에서 친구 카를로(가브리엘 라비아)를 만나 잠시 수다를 떤다. 우연히 호텔 창문을 올려다 본 마커스는 깜짝 놀란다. 영능력자 헬가(마샤 메릴)가 검은 가죽 장갑을 낀 괴한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방으로 뛰어 올라간 마커스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이후 신문기자 지아나(다리아 니콜로디)와 함께 사건의 비밀을 추적한다.
<딥 레드>는 아르젠토 스타일이 정점을 찍은 작품이다. 아르젠토가 색채를 다루는 능력은 가히 천재적인 경지였다. <딥 레드>에선 원색적인 컬러 팔레트로 요염한 색감의 제국을 건설한다. 이탈리아어 원제인 ‘프로폰도 로쏘’도 진홍색이라는 뜻이다. 물감 혈액이 가짜 티가 나지만 실제보다 밝은 주홍색이 오히려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극적인 고양감을 준다. 살인마의 스테인리스 칼날이 번쩍이며 희생자들의 살을 가를 때는 기묘한 관능마저 느껴진다.
아르젠토의 지알로는 추리극의 형식을 빌려 트라우마를 탐구한다. 트라우마는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살인마처럼 불현듯 찾아온다. <딥 레드>는 첫 영화 <수정 깃털의 새>(1970)의 확장판으로 보인다. 살인의 목격자인 외국인 주인공, 진실을 암시하고 은유하는 사물들, 왜곡된 기억과 정신병 등의 소재까지 똑 닮았다. 통상 지알로는 스타일을 과시하느라 서사를 대충 뭉갠 작품이 많은데 아르젠토의 추리극 서사는 꽤 성의가 있다. 추리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딥 레드>의 결말에 허를 찔려 즐거워할 것이다.
아르젠토는 장갑 낀 살인마의 손을 자신이 직접 연기하기로 유명하다. 살인마의 1인칭 시점으로 희생자에게 슬금슬금 다가갈 때 고블린의 록 리듬이 신나게 귀청을 두들긴다. 아르젠토가 익스트림 클로즈업 숏(피사체에 극히 가까이 접근한 촬영)을 들이대며 제 손으로 여성들을 유린하는 장면을 보면 사디스트 변태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딸인 배우 아시아 아르젠토가 출연한 <스탕달 신드롬>(1996)으로 여성혐오라는 비판은 더욱 거세졌다. 주인공 안나(아시아 아르젠토)가 연쇄살인범에게 강간을 당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은 강간을 쾌락적으로 연출하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후유증에 집중했다. 하지만 사디스트 감독이 딸까지 착취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아르젠토는 영화 제작자인 아버지와 패션 모델이자 사진 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예술적 토양으로 부모를 자주 언급해왔다. 지난해 영국 영화 전문지 토탈필름과의 인터뷰에선 “비평가들은 내가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완전히 틀렸다. 어머니가 위대한 여배우들의 초상을 전문적으로 촬영한 덕에 당연히 저는 우아함과 여성스러움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여성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항변했다.
현재 아르젠토는 예술적 총기를 잃은 모습이다. <섀도우>(1982) <페노미나>(1985) <오페라>(1987)를 비롯해 걸작들은 대부분 1990년대 이전에 나왔다. 영화산업이 테크니컬러 필름의 시대에서 디지털의 시대로 변화하면서 아르젠토의 탁월한 색감도 빛이 바랬다. <서드 마더>(2007)는 <서스페리아>와 <인페르노>(1980)를 잇는 ‘마녀 3부작’을 용두사미로 장식하고 말았다. <지알로>(2009) <드라큐라 3D>(2012) <다크 글래시스>(2022)까지 견딘 이유는 오로지 팬심이었다. 하지만 아르젠토 전성기의 핏빛 아름다움은 언젠가 지알로의 제왕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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