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의 경고, 한동훈은 '윤석열 화형식'을 하게 될 것인가?

박세열 기자 2024. 7. 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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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칼럼] 윤석열과 한동훈에게 들려주는 '김영삼과 이회창의 이야기'

민주화 이후 대통령과 척진 여당 대표가 두 명 있었던 것 같다. 1997년 대선을 앞둔 신한국당(후에 대통령과 결별하며 한나라당 창당) 이회창이다. (2007년 대선 때 통합민주당은 잦은 이합집산으로 여당으로 보기엔 애매하다.) 그리고 지금 집권당의 대표이자 차기 대선주자로 현직 대통령과 척을 진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다. 한동훈과 이회창 사이에서 꽤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회창의 '대쪽'이란 별명이 어울리는 건 한동훈도 마찬가지다. 둘 다 법조인 출신이다. 실제 청렴한지 여부와 별개로, 이들은 '청렴한 이미지'로 여의도를 넘어 대중적 인기를 구가한 인물들이다. 현직 대통령에 의해 전격 발탁돼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것도 그렇고, 대통령이 밀어줘 당 대표직(이회창은 총재, 한동훈은 비상대책위원장)을 거머쥔 것까지도 스토리가 비슷하다. 이후 대권을 바라보며 '자기 정치'를 위해 현직 대통령에 각을 세우고 있는 것도 그렇다.

거의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도 정치에선 하나의 재미다. 한동훈의 미래는 1997년의 이회창이 될까? 아니면 이회창을 넘어서는 스토리를 써 나갈까?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의 관계를 떠올리며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면 흥미가 생길 것이다.

YS 정권의 몰락이 가시화된 건 1996년 12월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사태였다. 이후 민심 악화를 감지한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3월 이회창을 직접 불러 신한국당 대표를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하늘 아래 태양이 둘 있을 순 없는 법, 둘의 밀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회창이 대권과 당권을 동시에 거머쥐려 한다고 생각한 친김영삼(당시 민주계)계는 동요하기 시작했고, 온갖 꼬투리를 잡아 '대표 사퇴론'을 제기하며 이회창을 흔들어댔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걸 방관했다. 불쾌했던 이회창은 1997년 7월 대표직에 오른지 4개월만에 사퇴한 후 대선후보 경선에 도전한다. 이회창은 새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각오로 대선 후보 '완전 경선' 주장을 관철시키고 당 총재(김영삼)의 입김을 견제하며 신한국당의 대선 주자로 올라 선다.

이회창이 실제 대선주자 자리를 거머쥐니, 김영삼 대통령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속으론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대통령의 인기는 바닥을 기었고, 한국 경제에는 'IMF 전야'의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9월 당 총재직을 이회창에게 넘겼다. 그리고 김영삼과 이회창, 둘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골이 깊이 패이게 된다.

당시 김대중을 위시한 야당은 대권 유력 경쟁자인 이회창의 '자녀 문제'에 대한 의혹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있었다. 두 아들의 '병역' 문제였다. 이것이 이회창 평생 정치 인생에서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할 거란 사실을 당시 이회창은 알 수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자녀 병역 의혹에 대한 순진한 대응을 후에 자책했을 정도였으니.

총재직을 인계받은 이회창은 '자기 정치'에 대한 확신을 갖고 거침없이 '3김 청산론'의 포문을 열어 젖혔다. 경쟁자인 야당 김대중과 함께, 여당의 대통령이자 '영원한 총재' 김영삼을 동시 겨냥한 것이다. 세대 교체론으로 무장한 그는 '전선'을 여야 구분 없이 확장했다. 먼저, 이회창은 청와대에서 나온 문건을 토대로 강삼재 사무총장에게 '김대중 비자금 의혹 제기'를 지시한다. 김대중 진영은 벌집 쑤신듯 들끓었다.

김영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빨은 빠졌으되 여전히 현직 대통령이다. 기세를 올리던 이회창 총재는 국회 대표 연설을 통해 김영삼 정부의 경제 정책을 포함해 '3김 정치'를 비판했다. 그 시간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비자금 의혹 수사 전격 중단을 지시했다. 이회창의 국회 연설이 생중계되고 있던 TV 화면에 "비자금 수사 중단"이라는 속보 자막이 지나갔다. 이 장면이 2017년 대선을 가르는 결정적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회창은 격노했다. "나는 마치 대중 앞에서 뺨을 맞은 것 같은 모욕감을 느꼈다." 이회창이 회고록에 쓴 문장이다. 김영삼은 왜 그랬을까? 이회창은 김대중 비자금 파문의 불똥이 1992년 김영삼 대선 자금 의혹으로 튈까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봤다. 실제 이회창은 TV 토론회에서 '김대중 비자금' 폭로와 관련해 "1992년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 자금 의혹이 제기되면 어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DJ 비자금과 같이 성역없이 처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한 터다. 대통령도 비리가 있다면 '국민 눈높이'에서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당 경쟁자와 현직 대통령을 '구세대 정치'로 규정하고 동시 청산을 주장했던 이회창. 그는 성공했을까.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회창은 김영삼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한다. 말이 탈당 요구지 사실상 '출당' 각오였다. 김영삼에 분노한 이회창의 '강성 팬덤' 지지자들은 경북에서 열린 대선 필승결의대회에서 '03 마스코트'를 막대기로 두들겨 패고 '김영삼 인형 화형식'을 감행한다. 이회창은 그런 행동을 저지시키지도, 그들을 대신해 사과하지도 않았다. 이회창 본인이 "집권당 후보가 정치 혁신의 카드로 내세운 (김대중) 비자금 폭로를 집권당의 대통령이 뒤엎어 버리는 것은 나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가한 것"이라고 말한대로,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이회창과 현직 대통령과 갈등을 키워냈다. 결국 그는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극복하지 못했다.

'3김 청산'의 대의 명분을 제기하는 틈새로 야당의 '자녀 병역 비리' 의혹이 파고 들었다. 노골적인 '이인제 지원설'이 튀어 나왔다. 이회창호(號)에서 '김영삼계' 의원들이 탈당해 이인제에게 모여들었다. 거기에 김영삼은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을 지지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이회창에 비토를 놓았다.

이회창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순의 민주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을 출범시켰다. 이회창과 김영삼 두 사람의 갈등은 보수 정당을 이인제 당과 이회창 당으로 쪼개 놓았다. 이회창에 의해 '청산 대상'으로 지목된 '3김의 마지막 축' 김종필은 김대중과 연대해 '이회창 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은 이회창에게 안 좋게 돌아갔다. 결국 그는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 회자되는 유명한 말이 있다. 현직 대통령이 다음 대통령을 만들 순 없지만, 다음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자를 '안 되게' 만들 수는 있다.

그저 재미난 옛날 이야기인가? 그런데 이 옛날 이야기 속 등장 인물에 현재 인물들의 이름을 대입해 보면 묘한 기시감을 뽑아낼 수 있겠다. 이 스토리에서 이회창 이름 자리에 한동훈이라는 이름을 넣고 김영삼 이름 자리에 윤석열의 이름을 넣어보자. 개혁신당과 조국혁신당, 각각 보수와 진보 뿌리를 두고 나뉘어져 있다. 아마 대선을 앞두면 새로운 이합집산의 재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서 있는 자리는, 김영삼 정권 말기 권력 다툼의 장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희한하게도 '정권 말기 현상'을 정권 중반기에 불러들인 유일무이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겠다.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 역풍을 발판 삼아 집권 중반에 '과반 확보' 여당을 만들어낸 바 있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 중반에 '국정 역풍'으로 헌정사에 기록적인 108석 여당을 만들어 냈고 레임덕을 앞당기고 있는 중이다.

그 틈바구니에 현직 대통령을 등에 업고 단숨에 대중 스타가 됐다가, 자력으로 현직 대통령과 대립하는 여당 원톱 자리에 오른 한동훈이 있다. 그는 야당 경쟁자인 '이재명'과 여당 내 걸림돌인 '윤석열', 둘 다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73년생이란 '신세대론'은 그의 무기다. 그리고 하필 그에게도 '자녀 관련 의혹'이 꼬리표처럼 달렸다.

그 시절 김영삼 대통령처럼,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 백척간두에 서 있다. 자식이 사법 기관에 고초를 당한 것처럼, 부인이 사법 기관에 고초를 당하고 있다.(물론 아직 '당하고' 있진 않지만, 앞으로 당하게 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이다.) 이회창에게 약점 잡힌 후 반격한 김영삼처럼, 지금 대통령도 한동훈에게 약점 잡힌 채, '반격'을 노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친윤'과 반목하는 한동훈의 강성 팬덤 세력이 언젠가 '윤석열 인형 화형식'을 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윤심'을 등에 업고 한동훈을 지독하게 공격했던 원희룡이 당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과거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이회창 총재가 (인형) 화형식을 했다. 차별화를 시도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에게 정권을 겨 우리가 10년 동안 야당을 했다." 한동훈을 대하는 원희룡의 인식이 '이회창'에 가 닿아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인간 군상의 '권력욕'은 시대에 따라 형태는 변하나 그 본질이 변하진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역사는 반복된다'는 건 여의도 호사가들의 말일 뿐, 실제 역사가 반복되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사후 비교를 통해서다. 한동훈은 자신의 앞길을 어떻게 '창조'해낼 것인가. 아니면 그 흔한 '반복'의 길을 따라 갈 것인가. 집권 반환점을 갓 돌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말기적 현상'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떠오른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4차 전당대회에 입장하며 한동훈 당대표 후보와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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