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의 달달하게 책 읽기] 콜센터·택배 분류… AI에 묻힐 직업들의 속사정
고양이용 모래를 택배로 받으면 몇 번에 한 번은 비닐포장 옆구리가 터져서 모래가 흘러나왔다. 원래 포장이 약한 건가 보다 했는데, 한승태의 ‘어떤 동사의 멸종’(시대의창)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까대기’라고 불리는 택배 상하차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무거운 데다 사람이 쓰지 않는 물건을 다룰 때 매우 분노해 막 던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에는 전화상담, 택배 물류센터, 식당, 건물청소 등 AI 시대에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는 직업들의 현실을 초접사 기법으로 다루고 있다. 예전엔 탄광에서 일하는 것을 ‘막장’이라 표현했는데 이들이 현대식 ‘막장 직업’인 셈이다. 일 안에서 서로 돕거나 골탕 먹이는 다양한 관계가 형성된다. 고추장 비빔밥 한 덩어리를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서 일하다 한 숟가락씩 먹는 총감독 격 주방장의 밥그릇 얘기를 읽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현장 노동을 하며 글을 쓰는 한승태는 얼굴이 알려지면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얼굴 없는 작가로 활동한다. 한국 노동 에세이의 개척자이자, 가장 오래 이 일을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먹먹한 얘기지만 블랙 코미디로 가득하다. “이 사람이 정말 우리 엄마라고?” 어머니가 전화 상담원에게 수모를 당했다며 항의하러 온 자식에게 통화 녹음을 들려주며 어머니가 상담원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려주니 나온 말이다. 이 장면에서는 분노 대신 웃음이 터졌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AI에 대체되는 작가의 얘기가 자전적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책은 사라지고, 누구에게나 자기 취향에 맞게 글을 써 주는 개인용 AI 작가가 있는 시대의 얘기다. 어쩌면 책이 다루는 노동은 멀지 않은 장래에 대체될 현장의 마지막 소묘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전화상담원에 대한 대규모 해고는 이미 시작되었다. 책을 덮고 기억에 남는 건 두 장면이었다. 육체적 극한까지 가는 ‘까대기’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우울증이 없다는 것. 일을 마치고 보람과 성취감이 느껴지는 노동은 청소라는 것. 일하다 힘들 때 심리치료 역할로도 이 책이 아주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책엔 지금 하는 내 일이 무척 아름답게 보이는 순기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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