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 품은 ‘국립근대미술관 설립’ 힘 실리나
근대 미술을 위한 별도 미술관
지난 2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립 20C(근대)미술관 건립을 위한 모임’의 세미나에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참석해 “근대미술관의 필요성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인사말을 했다. 2021년에 미술계 인사들이 이 모임을 만든 이후 몇 차례 열린 세미나에 정부 고위 공무원이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 장관은 세미나에 정부 입장이 실리는 게 아니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면서도 “어쨌든 오늘 여기 오면서 근대미술관에 대한 필요성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제는 좀 필요할 때도 됐다. 사실은 조금 늦은 감도 없지 않다”고 밝혔다.
고(古)미술에서 동시대 현대미술로 넘어오는 변화의 시기인 ‘근대’에 특화한 국립근대미술관은 한국에는 아직 없으며 민간이 정부에 설립을 촉구하는 단계에 있다. 프랑스의 경우, 고미술을 주로 다루는 루브르박물관과 현대미술을 다루는 퐁피두센터와의 시대적 간극을 고려해 그 연결고리가 될 오르세미술관을 1986년에 개관했다. 루브르박물관에 있던 인상주의 미술작품과 그 전후의 19세기 중반~20세기 초 미술작품을 이곳으로 옮겨 오르세가 근대에 특화한 미술관이 되도록 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테이트미술관이 발전소를 개조한 테이트모던을 2000년에 개관하면서 기존의 미술관 테이트브리튼은 19~20세기 초 미술을 주로 다루고 테이트모던은 20~21세기 미술 쪽으로 특화했다.
한국에서 국립근대미술관 논의는 2021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문화유산 및 미술 컬렉션, 즉 이건희 컬렉션의 국가 기증을 계기로 본격화 되었다. 이건희 컬렉션 중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 중에 (탄생 순서대로) 나혜석·이상범·김환기·박수근·유영국·이중섭 등 근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대거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도로 가져와 별도의 이건희 기증관에 같이 두면 체계적인 뮤지엄이 될 수 없으며 “그저 잡탕밥이 될 뿐”이라는 미술계의 비판이 있어 왔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국립근대미술관을 세우자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건희 컬렉션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그대로 두되 그 중에 근대미술 작품을 골라내고 박물관과 미술관의 원래 컬렉션에서도 근대미술 작품을 골라내 이들을 모아 별도의 미술관을 세우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국립 20C(근대)미술관 건립을 위한 모임’이 발족했다.
이번 세미나에 문체부장관이 참석해서 인사말을 함으로써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의 가능성이 전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실현되는 데는 건축과 관련한 행정적 문제와 그 콘텐트를 둘러싼 학문적 문제 등이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 계속 진행되고 있는 이건희 기증관 설립 계획과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관건이다.
이와 관련해 ‘모임’ 상임간사인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이건희 기증관은 일부 정치적인 관료들이 (컬렉션 기증을 받은 것을) 자신의 치적처럼 행세하며 졸속으로 밀어붙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건희 기증관을 만드는 대신 “기증 이건희 컬렉션의 근대미술작품을 가려 근대미술관 내에 ‘이건희 실’ 혹은 ‘이병철-이건희 실’을 마련하고 이 기증이 국립근대미술관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을 밝혀 예를 표하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그는 “가장 빠른 방법은 대통령이 결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정 간사는 세미나 발표에서 국립근대미술관 부지는 본래 이건희 기증관 부지로 정해진 서울 송현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근처)이 적당하며, 여기에서 문체부가 소유한 부지는 26%에 불과하고 서울시가 74%를 가지고 있는 만큼 서울시도 소유 부지의 절반을 출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송현동이 여의치 않으면 대통령실 이전에 따라 비게 된 청와대의 여러 건물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고 그는 제안했다.
한편 이번 세미나에 초대된 일본 전국미술관회의 회장 다테하타 아키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에게도 근대가 아름다운 시기는 아니었다. 자국의 군국주의에 반대한 일본 미술가들은 강제로 (태평양전쟁의) 전쟁터로 보내져 죽음을 맞았고 후지타 쓰구하루 같은 중요한 근대 미술가는 전쟁을 찬미하는 전쟁화를 그렸다가 패전 후에 규탄 당하고 결국 일본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하기도 했다.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의 학예사들은 그 모든 어두운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술가들의 독창적 표현은 과거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과거와의 연속성을 위한) 국립근대미술관의 설립을 기대해 본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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