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협 건너간 조선 소와 명란젓

2024. 7. 2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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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조선
임채성 지음
임경택 옮김
돌베개

일제강점기 역사에 다가서는 경로는 다양하다. 워낙 비극적인 양국 관계에 근대문명 도입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중첩되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 일본 릿교(立敎)대 경제학 교수인 지은이는 매일매일 먹고 마시는 일을 바탕으로 한일 양국,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역사적 관점에서 파고든다. 조선 재래상품으로 일본·만주·중국북부로 수출된 쌀·소·홍삼, 맛의 교류를 잘 보여주는 우유·사과·명란젓, 그리고 소주·맥주·담배 같은 기호품을 대상으로 당시 새로운 음식산업의 이식과 재편을 살폈다. 근대화론도 수탈론도 아닌 광범위한 통계와 문헌을 바탕으로 하는 실증적 연구로 당시의 조선경제사에 접근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식민지화 이후, 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했던 조선의 푸드시스템은 본격적인 구조변화를 겪었다. 과수원과 식료공장이 들어서고, 음식자원은 조선 내부에 한정되지 않고 일본이나 만주, 중국 일부에도 유통됐다. 식품산업의 변화 바람은 농촌·산촌·어촌에도 밀려와 민중 생활도 변화했다. 서양 사과와 우유가 유입돼 소비됐고, 음주·흡연 습관도 변화를 겪었다. 영양섭취 구성이 바뀌면서 신장·체중 등 체위도 변했다.

평양 우시장. 『조선흥업주식회사 30주년 기념지』(1936, 조선흥업주식회사 엮음)에 실려 있는 모습이다. [사진 돌베개]
그런 점에서 식민지 시대 조선 소(赤牛)의 역할 분석은 부쩍 관심이 간다. 조선에서 수많은 소가 대한해협을 건넜는데, 당시는 농업 기계화 이전이라 식육용은 물론 생산재의 성격도 강했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그 결과 조선 소는 일본 농업을 지탱하는 도구였을 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에게 육류를 경험하게 해준 영양 자원으로서 ‘제국의 소’가 됐다.

동시에 조선에는 홀스타인종의 젖소가 들어와 도시를 중심으로 우유와 연유·버터 등 유가공품을 공급해 식생활의 서양화를 이끌고 ‘문명적 자양’이 됐다. 하지만 위생문제로 사회문제가 발생하자 공동 저온살균장 건설 등을 둘러싸고 위생경찰과 업자들이 힘겨루기를 했다. 그 과정에서 1938년 경성우유동업조합이 설립됐다. 조합과 총독부가 1939년 ‘농유장려 5개년계획’을 세워 일본산 유제품을 ‘반납’하고 조선산 유제품의 만주·중국 공급을 논의했다는 사실은 눈길이 간다.

수산업은 경쟁과 교류가 동시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일본인 어부 등의 조선 이주로 갈등이 고조되는 와중에 극적인 반전이 벌어진다. 함경도 특산물 명란젓이 일본인 이주민을 중심으로 소비되다 일본 전역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공산업도 형성됐다. 명란젓은 해방 이후 일본에서 누구나 즐기는 음식으로 완전히 정착됐다.

사과는 서양 품종이 조선에서 재배돼 일본이나 중국 등지로 수출됐다. 지은이는 이로 인한 조선 고유 품종의 운명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쌀의 경우 식민지 시대에 ‘비료에 고반응하는 벼 품종’이 개발돼 조선·대만·만주에도 보급됐으며, 일부 일본 학자는 당시 제국일본판 ‘녹색혁명’이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은이는 당시 조선과 일본의 생산성 격차가 커서 녹색혁명은 한정적 의미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한일 격차는 1971년 한국에서 통일벼가 나오면서 해소됐다는 설명이다. 참고로 밥맛이 떨어지는 통일벼는 1992년 정부 수매 중단으로 더 이상 재배되지 않는다.

음식문화 교류와 식품산업의 발달은 식민지 통치의 재정적·산업적 기반이 됐다. 식민지를 통치하려면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는데 조선총독부는 적자에서 헤어나지 못해 도쿄의 보조금 지원에 의존했다. 일본 대장성은 조세나 전매 이익금을 늘리도록 요구했다. 총독부는 주류, 조선 홍삼, 담배 등 기호·보양 식품의 유통을 통제해 통치 자금을 확충했다. 홍삼·담배의 전매제도와 주류에 대한 높은 세금은 해방 후에도 장기간 계속됐다.

조선의 식음료산업에 뛰어든 종합상사를 비롯한 일본 기업의 활동도 흥미롭다. 조선맥주나 기린맥주는 조선에 공장을 세우고 맥주를 만들어 팔았다. 그 유산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제국의 팽창과 함께 사업을 확대했던 종합상사 중 미쓰이(三井) 물산은 조선에 주정식 소주를 독점 판매하고, 조선 홍삼을 중국 등에 수출해 총독부 재정에도 기여했다. 종합상사는 조선 미곡의 일본 수출과 광산 개발 등에도 손을 댔다.

식민지 시대를 논의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 때문에 지은이는 당시 조선의 식음료 산업은 정상적인 시장 메커니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전시통제경제 체제에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세운 ‘계획’이 상당히 좌우했다는 설명이다. 1943년 이후에는 식량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쌀 부족으로 만주에서 들여온 조와 콩깻묵으로 굶주림을 달랬던 시기다.

지은이는 식문화의 전파와 확산은 역사의 과정이며, 근대성은 물리적 폭력성과 정신적 통제를 동반한다고 강조한다. 음식을 경제사의 연구 주제로 삼은 배경이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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