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의 정서적 지도를 잘 그려내야 좋은 번역” [책&생각]
문학-연극-영화 종횡무진 이력
영화 제작 관련 책으로 첫 번역
레이먼드 카버부터 현대 희곡까지
“동시대의 공기 잘 포착하고파”
“어렸을 적 꿈은 고고학자였죠.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을 끼고 살았어요. 중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타제석기, 마제석기에 대해 배우고선 백과사전에서 만드는 법을 찾아본 뒤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매일 석기를 만드는 게 중요한 일과였어요.”
‘어린 고고학자’는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무언가 썼을 때 그것은 ‘시’의 형태였다. 그러다가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을 본 뒤에는 희곡을 썼다. 모두 3편을 썼고 그중 2편은 교회에서 또래 친구들과 함께 공연으로 올리기도 했다.
“무언가 쓴다는 건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당시는 군사독재 정권이라 많은 생각이 그런 문제들로 채워졌죠.” 당시 활발한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과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은 그를 연세대 신학과로 이끌었다. 하지만 신학보다는 연극과 문학에 더 몰두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대규모 집회 현장에서 집체극 등 공연을 올리는 일을 하다 다큐에 눈을 뜨게 됐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공과대학 대학원에서 영상제작을 공부했다. 다수의 텔레비전용 다큐를 찍으면서 사람들이 다큐에서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은근한 거짓말로 버무려진 다큐를 만드느니 극영화를 찍는 게 낫겠다 싶어 극영화로 방향을 틀었다. 첫 단편영화 ‘낚시 가다’가 2002년 오버하우젠 단편영화제 경쟁 부문에 선정된 뒤 서울예대 영화과 겸임교수로 재직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고영범 번역가의 첫 역서 ‘독립영화 만들기’(현재 제목은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십분짜리 영화학교’)가 나온 배경이다. “당시 한국에서 단편영화를 찍는 데 2천만원 이상 쓴다는 걸 들었어요. 단편은 장편으로 가기 위한 명함을 파는 것인데, 명함 파는 데 2천만원 넘게 쓴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이 책은 미국의 유명 감독인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7천달러로 장편영화를 만드는 이야기인데요, 이 책으로 영화는 돈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었죠.”
그를 눈에 띄는 번역가로 만든 작품은 레이먼드 카버 관련 작품들이다. 900쪽이 넘는 레이먼드 커버의 전기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과 시선집 ‘우리 모두’를 옮긴 데 이어 최근에는 카버의 인터뷰집 ‘레이먼드 카버의 말’을 내놓았다. 하루키가 자신의 문학적 스승으로 언급하는 카버는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이자 ‘더러운 리얼리즘의 대가’로 불린다.
카버 번역작에 오래 눈길이 가는 이유는 카버의 문장력에 뒤지지 않는 그의 문장력에 있다. 잘 통제되면서 세련된 문장들은 ‘활자중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읽을 게 없으면 불안하거든요. 미국 유학갔을 때 한국어 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영자 신문부터 소설까지 닥치는 대로 읽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의 섬세한 번역관 덕에 원문의 온도와 시선도 정교하게 살아 있다. “무조건 매끄럽게 옮기는 게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 권의 책 안에는 높고 험한 부분도 있고 계곡과 벌판도 있고 강물이 흐르는 부분도 있어요. 즉 일종의 지형도가 있어요. 그걸 모두 읽기 쉽게 만들어 버리면, 책 전체 지형도를 밋밋하게 만드는 것이죠. 원문의 정서적 지도가 살아 있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번역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도 “원문의 정서를 잘 이해하는 것”이다. “좋은 책이란 언어와 국적을 막론하고 정서의 층이 굉장히 다양하게 조직돼 있어요. 그래서 원문의 정서적 지도를 전체적으로 잘 파악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터키와 인도네시아 작품들을 번역한 것도 눈길을 끈다. “저는 ‘반고전주의자’예요. 독자들에게 처음 책을 쥐여준다면, 무조건 당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쓰인 책부터 시작해서 멀리 나아가고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 좋다고 봐요. 지금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보다 현재 인도네시아나 터키 작가를 읽는 게 더 중요하죠.”
그것이 그가 각별히 현대 희곡 번역에 애정을 쏟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극은 지금의 가장 날카롭고 껄끄러운 이야기를 합니다. 영미 현대 희곡의 주요 이슈는 성소수자(LGBTQ)예요. 한국에서도 장애, 인종, 성소수자 등의 주제가 좀더 활발히 이야기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 번역가 자신도 동시대의 공기를 끝없이 포착해내는 작가다. ‘에어컨 없는 방’ ‘방문’ ‘이인실’ 등 여러 희곡과 장편소설 ‘서교동에서 죽다’를 썼다. 말과 글을 동시에 다루고, 시각 매체와 활자 매체를 오간 이력은 그의 문장에 선명한 자기만의 인장을 남긴다. 상황을 시각적으로 포획해내는 어휘력과 이미지로 치환하는 은유력이 탁월하다.
지금은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면서 희곡·시나리오 작업부터 소설 창작, 번역까지 종횡무진하고 있다. 그에게 이 모든 작업은 크게 구분되는 일이 아니다. “다 같은 작업이에요. 이야기의 소재에 따라 알맞은 형식이 다를 뿐이죠.”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대체로 행복한 이야기들
2년 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지명된 인도네시아 작가의 단편소설집. 인도네시아 성소수자 등 다양한 인물들이 겪는 상처와 상실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다루는 부드럽고 서러운 톤, 낭창낭창한 리듬, 모서리를 누그러뜨리는 정서가 한결같이 아름답다”고 고 번역가는 추천했다.
노먼 에릭슨 파사리부 l 알마(2023)
불안
‘회교 근본주의’ 테러집단에 성노예로 잡혀 있다 탈출한 여인과 터키 의사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종교, 역사의 반복을 묵직하게 성찰하게 만든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무슬림을 이해하는 지침의 하나로 모자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고 번역가는 말했다.
O. Z. 리반엘리 l 가쎄(2018)
우리 모두
소설가, 에세이스트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던 카버의 다섯권 분량의 시집을 한데 묶은 것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카버의 시집이다. “그의 소설들이 시작된 지점을 제시해주면서 시가 이야기를 벗어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의 핵심을 향해 가장 빨리 날카롭게 달려들어갈 수 있는 형식임을 일깨워준다.”
레이먼드 카버 l 문학동네(2022)
펄프헤드
‘뉴요커’ ‘파리 리뷰’ 등 미국 매거진 저널리즘의 뛰어난 저술가인 설리번의 에세이집으로 우리가 모르는 미국 문화의 이면을 보여주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친형의 감전 경험부터 액슬 로즈와 마이클 잭슨 같은 가수 이야기, 미국 원주민과 자연을 속속들이 들여다 본 이야기까지 그 소재가 실로 종횡무진하다.”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 l 알마(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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