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시각장애인 소믈리에의 꿈
“영원한 소등.”
소믈리에 턱시도를 입은 중증 시각장애인 최은영(49)씨가 막 따른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와인 맛을 감별하는 직업인 소믈리에에 도전 중이다. 시작한 지 4개월 됐다. “레드 와인의 떫고 씁쓸한 맛이 시력을 잃은 날 느낀 절망감을 닮았다”며 “잠깐의 정전인 줄 알았는데 영원한 소등인 걸 알게 됐을 때의 맛”이라고 했다.
그는 시력을 잃기 전까지 회계 사무소에서 일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다. 입사 10년째가 되던 해, 시각장애가 갑자기 찾아왔다. “왼쪽 눈에 모래가 들어간 듯 통증이 있어 안과를 찾았는데 진단 결과는 ‘이상 없음’. 그러다 한순간에 세상의 불빛이 전부 꺼졌어요.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해 뇌척수까지 뽑아 검사했는데도 원인을 찾지 못했어요.” 최종 진단명은 ‘시신경 염증’이었다.
스물아홉. 시력도, 직장도, 일상도 모두 잃기에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왼쪽 눈 시력은 완전히 상실했지만, 오른쪽 눈은 시력이 아주 조금 남아있었다는 것. ‘마음의 시련을 극복하면 몸의 시력도 회복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절로 들어갔다고 한다. 충북 단양 구인사에서 봉사 활동하며 3년을 보냈다. 조금씩 오른쪽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니터에서 글자를 확 키우면 형태는 알아볼 수 있는 정도로 좋아졌다.
서울로 돌아왔지만 구직은 쉽지 않았다. 취업에 실패하고 조카 두 명을 돌봤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이사를 가면서 또다시 직업을 찾아야 했다. 2021년부터 시각장애인의 구직 활동을 돕는 스타트업에 들어가 러시아인·베트남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전화 통화 수업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깥일’에 대한 열망은 점점 더 커져갔다.
소믈리에 도전을 제안받은 것은 올 3월. 그가 소속된 업체와 서울 청담동 한 레스토랑이 협업해 일반인보다 미각·후각이 예민한 시각장애인의 장점을 살려보자는 취지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실제 프랑스에선 시각장애를 가진 소믈리에가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와인을 흔히 ‘색’ ‘향’ ‘맛’ 세 가지를 즐기는 술이라고 한다. 코와 혀의 감각이 발달한 시각장애인은 오래된 와인이 상하는 현상인 ‘부쇼네’를 더 잘 잡아낼 수 있어 빈티지 와인이 많은 파리 레스토랑에서 더 환영받는다고 한다.
그의 꿈도 서울 한복판 레스토랑에서 소믈리에로 일하는 것이다. “시각장애인 대부분이 안마사를 하거나 사람들과 접촉이 거의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한계를 극복해 보고 싶다”고 했다.
‘영원한 소등’이라고 표현했던 잔을 그가 빙빙 돌렸다. 한참 동안 공기를 만나 산화(酸化)한 와인은 부드러워졌다. 떫은맛은 감칠맛으로 변했다. 쿰쿰한 냄새가 사라지고 향긋한 과일 향이 진해졌다. “와인이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시간을 두고 충분히 숨 쉴 수 있도록 빙빙 돌린 것뿐인데 진가가 조금 늦게 나타난 것뿐이다. 시각장애라는 현실도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희망이 있다. 시각장애인에게도 이렇게 향긋한 향이 피어오를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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