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누가 리더를 죽였나

박병률 기자 2024. 7. 2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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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속 출근길. 붐비고 꿉꿉한 지하철에서 한 학생이 멘 백팩에 붙어 있는 작은 문구 하나가 눈을 사로잡았다. ‘각계각층의 지도자 양성학교.’ 개인의 출세나 영달보다는 조국과 인류의 번영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인재를 선발하겠다며 설립한 강원도 소재 A학교 소개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는 지도자를 ‘집단의 통일을 유지하고 성원이 행동하는 데 있어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지도자를 영어로 바꾼 표현이 리더다.

한국 사회에서 리더가 사라졌다는 한탄이 나온 지 오래됐다. 믿고 존경해 따를 만한 리더 같은 리더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은 한국 사회를 이끌 리더를 뽑는 선거였다기보다 나쁜 리더를 뽑지 않기 위한 선거에 가까웠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다.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선거, 누가 돼도 강한 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괴감까지 느낄 필요는 없다. 리더가 사라진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다. 당장 미국만 해도 대선에서 인물난을 겪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조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출마 포기를 선언했지만, 직전까지 고령자 두 명의 선거였다. 수많은 인재가 있다는 미국조차 이렇다.

회사, 모임과 같은 조직에서도 믿고 따를 만한 리더는 부족해 보인다. 리더 실종사건은 변화된 경제·사회적 환경에 맞춰 리더가 될 자질을 가진 사람이 부족한 것이 1차적인 문제다. 리더십, 도덕성, 희생정신, 유연성 등을 두루 갖춘 인재를 찾기 어렵다. 여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사회적 분위기다. 리더를 하겠다며 나서는 사람이 없다.

학교에는 반장이 귀해지고 있다. 반장을 하면 자신의 시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반장의 리더십보다 성적에 따른 보상이 더 크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승진을 달가워하지 않는 직장인도 늘어난다. 승진을 하면 책임과 업무는 많아지는데 보상은 이에 따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봉제 위주의 상후하박 보상체계가 한국 직장에 아직 많다. 임원은 계약직이라 고용보장도 되지 않는다. ‘가늘고 길게 가자’가 직장인들의 모토가 된 지 오래다. 임원이나 팀장으로 승진하지 않고 정년까지 만년 차장 혹은 직원으로 남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화려함보다는 실속이다. 만년 차장을 리더(leader)에 빗대 엘더(elder)로 부르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각자도생의 시대다. 조직을 위해 일하겠다며 손을 들 사람은 많지 않다.

관료사회도 마찬가지다. 차관은 관료사회 꽃으로 불렸다. 하지만 요즘은 은근히 차관보로 남는 걸 선호하는 분위기다. 커지는 책임은 차치하고 차관 승진이 되면서 생기는 불이익이 적잖다는 것이다. 차관은 정무직이라 사실상 특정 정권의 사람으로 인식된다. 가뜩이나 자리가 무거워 퇴임 후 갈 곳이 없는데 자칫 정권교체라도 되면 낭패일 수 있다.

금융권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은행장은 금융지주 회장이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자리로 매우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최근 금융사고 때 그 책임을 은행장이 직접 지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고 한다. 금융당국의 제재를 받게 되면 금융권에서 퇴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장이 되기보다는 적당히 임원직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는 분위기도 있다고 한다. 금융지주 회장이 될 가능성도 이쪽이 높아졌다.

과거 리더들에게는 막대한 권한이 주어졌고, 이는 권위가 됐다. 하지만 전통적인 위계질서가 약해지고 민주적 절차가 중요해지면서 권한과 권위는 오히려 부담이 되고 있다. 반면 추가로 주어지는 보상은 박하다. 리더가 되는 것이 손해라는 인식이 커져서는 좋은 리더가 나올 수 없다.

집단지성이 중요하다고 해도 결정을 하는 사람은 리더다. 리더가 정하는 방향에 따라 조직이 움직이는 한 리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사장이 누구냐에 따라, 팀장이 누구냐에 따라 국가나 회사, 팀의 운명이 달라진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조직,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위기는 리더 실종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리더를 길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더가 조직의 지도자로서 그 조직이 지니고 있는 힘을 맘껏 발휘하고 구성원의 화합과 단결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달라지는 상황에 맞게 리더의 역할을 재정비하고 보상체계를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희생이나 헌신, 사명감만으로는 안 된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박병률 콘텐츠랩부문장

박병률 콘텐츠랩부문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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