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희생자 첫 유해 봉안식…행안부 행사 축소 논란
25일 오전 전남 구례군 구례실내체육관. 앞쪽 단상에 흰 천으로 감싼 유골함 4개가 나란히 놓였다. 전남 담양군 대덕면 문학리 옥천약수터에서 발견된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유해다. 아직 이름을 찾지 못한 유해를 앞에 두고 추모하는 이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여순사건 때 큰아버지가 희생됐다는 유족 이병영(90)씨는 “큰아버지가 구례 용방면에 사시다가 보도연맹사건으로 연락이 끊겼는데 이번에 발굴된 유골 중에 있으실 가능성이 크다”며 “꼭 큰아버지를 찾아 제대로 된 제사를 올려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국무총리실 소속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위원장 한덕수 국무총리)가 주관한 ‘2023 여순사건 희생자 유해발굴사업 봉안식 및 최종보고회’였다. 지난해 10월부터 진행한 발굴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유해가 발견된 희생자를 추모하는 자리다. 여순사건 관련 유해 봉안식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1일까지 여수·순천 등 전남, 전북, 경남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민간인 희생 사건이다.
이날 위원회는 담양 옥천약수터,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횟골 2곳을 대상으로 발굴조사에 나섰으나 구례에서는 유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애초 19구로 추정했던 담양 옥천약수터 유해는 26구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발굴 장소에서 고무신 53점, 머리빗, 곰방대, 단추, 허리띠 등과 함께 탄두, 탄피가 나와 희생자들이 갑자기 끌려가 총살을 당한 것으로 봤다. 15살 전후로 추정되는 청소년 유해도 섞여 있었다.
위원회와 여순사건 연구자들은 희생자 모두 구례에서 붙잡힌 국민보도연맹 구례지부 가입자들로, 담양을 거쳐 광주형무소로 이동하던 중 담양에서 사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위원회는 1950년 7월14일 담양 문학리 야산에서 예비검속자들이 15명씩 묶여 30여명이 총살당했다는 주민 증언도 확보했다. 유골은 이날 세종 문화의집으로 옮겨져 유전자 분석에 들어간다.
희생자들의 피해가 열거될수록 유족들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이근선 구례 희생자 유족 대표는 “희생자들은 재판은커녕 제대로 조사도 받지 못하고 그 먼 곳까지 끌려가 돌아가셨고 가족들은 평생 죄인 취급을 받고 살았다”며 “상설기구를 설치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철저히 물어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첫 유해 봉안식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행사를 바라보는 일부 유족과 시민단체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여순사건 피해 신고 처리율(진상규명 0건, 희생자 여부 결정률 9.6%)이 저조한 상황에서 행사 규모를 축소하려는 분위기마저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원회는 유해 발굴 장소의 보전 대책이나 추모사업 계획도 밝히지 않았다.
여순10·19범국민연대가 공개한 행사 개최 계획 공문을 보면 참석 인원은 애초 50여명으로, 위원회 관계자, 전남도·구례군 공무원, 구례 유족으로 한정했다. 시민단체는 전체 유족에게 이번 행사 소식을 알려 참석 인원을 500명 규모로 확대하고 전남도지사, 지역 국회의원, 여수·순천 등 전남 동부 6개 시군 단체장, 기초의회 의원을 초청해야 한다고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뒤늦게 행사 소식을 들은 여수유족회 회원 20여명이 도착하자, 의자 50개만 준비했던 위원회는 서둘러 의자를 추가로 놓기도 했다.
서장수(75) 여수유족회 회장은 “현 정부 들어 진상규명 속도가 더뎌지고, 뉴라이트 계열 위원을 위촉하는 등 여순사건을 은폐, 축소하기 위한 시도가 보인다”며 “이번 행사 개최 소식도 다른 유족으로부터 전해 듣고 규탄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행사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박경현 위원회 진상규명과 과장은 “유골은 보도연맹 희생자들이다. 세종 문화의집으로 보내기 전 구례 유족만 초청해 추모식을 열기로 했다”며 “축소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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