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생수까지?” 마실 땐 좋은데…버릴 엄두가 안 나 [지구, 뭐래?]
[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최근에 마시는 물 바꿨어요”
직장인 A씨는 정수기와 페트병 등을 거쳐 최근 종이팩 생수에 정착했다. 정수기 정기 점검, 페트병 미세플라스틱 등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런데 또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바로 쓰레기 처리다. 종이팩을 신문지나 상자와 같은 폐지류와 함께 버리면 재활용이 되지 않는다. 종이팩의 재활용까지 고려한다면 오려 모은 뒤 주민센터나 판매처 등에 가져가야 한다.
종이팩은 플라스틱의 현실적인 대체재로 꼽힌다. 종이팩을 생산하고 폐기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가 플라스틱의 3분의 1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에 해외에서는 유제품이나 주스 등 음료뿐 아니라 물까지 종이팩이 포장재로 널리 쓰인다. 그만큼 재활용률도 높다. 벨기에의 경우 99.4%, 스웨덴도 약 80%에 이른다.
그러나 국내에서 쓰고 버린 종이팩 중 재활용되는 건 7개 중 1개 정도다. 심지어 종이팩 재활용률은 날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종이팩 수요가 높아지는 만큼 국내 실정에 맞는 종이팩 수거 및 재활용 체계를 하루빨리 갖춰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에 따르면 종이팩 재활용률은 13.7%(2022년 기준)다. 2016년 25.7%에서, 2020년 15.8%, 2022년 13.7%로 감소 추세다.
종이팩 재활용률이 떨어지기 시작한 건 멸균팩 사용이 늘어난 영향이다. 종이팩은 흔히 우유팩으로 불리는 ‘살균팩’과 두유, 주스 등을 주로 담는 ‘멸균팩’으로 나뉜다. 멸균팩은 장기간 상온에서 보관할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를 위해 멸균팩은 빛과 산소를 차단하는 알루미늄 호일 등 종이 외에도 6종류의 포장재로 구성된다.
업계에 따르면 종이팩 중 멸균팩의 비중은 2014년 25.3%에서 2022년 47.4%로 빠르게 늘어났다. 내년에는 절반 수준, 2030년에는 65%까지 늘어날 거라는 전망도 있다. 멸균팩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살균팩 위주로 돌아가던 국내 폐기물 및 제지업계에서 재활용에 과부하가 걸린 셈이다.
국내에서는 멸균팩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지만, 해외에서는 비용과 에너지를 아껴주는 ‘효자’로 통한다. 상온 보관이 가능한 멸균팩 특성 상 냉장 유통을 하지 않아도 돼 에너지와 비용을 아낄 수 있다.
멸균팩이 살균팩보다 재활용하는 시간이 짧다는 점도 장점이다. 종이류를 재활용할 때는 종이를 물에 녹이고 푸는 해리 공정을 거친다. 멸균팩의 해리 시간이 20분 가량이라면 살균팩은 1시간 이상 걸린다.
이에 대해 테트라팩코리아 관계자는 “살균팩의 해리 시간에 맞추면 멸균팩의 알루미늄 호일 층까지 깨지므로 분류해야 한다”며 “공정 자체가 짧기 때문에 물 사용이나 에너지 절감 면에서 멸균팩이 살균팩보다 친환경적”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멸균팩과 살균팩의 재활용 공정의 차이가 국내 종이팩 재활용률 하락으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현재 멸균팩과 살균팩이 국내 종이팩 시장을 양분하면서 어느 하나도 제대로 재활용하지 못하는 셈이다.
종이팩 재활용률이 높은 벨기에나 스웨덴 등 유럽권 국가들의 경우 멸균팩이 주로 쓰인다. 멸균팩이 대다수를 차지하므로 선별과 재활용도 비교적 수월하다. 냉장 유통이 잘 이뤄진 미국과 미국의 영향을 받은 일본과 우리나라는 그동안 살균팩을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점차 우리나라도 상온 보관과 유통이 쉬운 멸균팩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류정용 강원대 제지공학과 교수는 “멸균팩 사용이 늘어나는 건 전세계적 추세로, 국내에서도 멸균팩이 살균팩 사용량을 넘어설 것”이라면서 “멸균팩 재활용에 적응하면서 살균팩까지 재활용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애초 살균팩과 멸균팩을 함께 재활용할 수 있도록 생산하자는 이야기다. 살균팩은 폴리에스테르 필름과 종이로 포장재 구성이 단순한 만큼 종이가 물에 쉽게 녹지 않도록 하는 첨가제가 들어간다. 살균팩을 생산할 때에 이 첨가제를 줄이면 살균팩과 멸균팩은 물론, 상자 등과도 한꺼번에 재활용할 수 있다는 게 류정용 교수의 설명이다.
아울러 시민들이 종이팩도 문 앞에 내놓고 버릴 수 있도록 분리배출 체계도 갖춰야 한다. 현재는 상자 등 종이류와 종이팩이 같은 분리배출 품목으로 묶여 있다. 이에 일부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종이팩을 따로 모아 주민센터나 판매처 등으로 가져가는 식으로 배출하고 있다.
류정용 교수는 “현 분리배출 체계는 시민들에게 종이팩 분리배출 부담을 전가하고 있다”며 “적어도 종이류와 종이팩은 따로 버릴 수 있도록 분리배출 품목을 나눠야 한다”고 덧붙였다.
addressh@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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