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우리의 중산층이 심상찮다
경제 불평등이 정치 양극화로 민주주의 근간 흔들릴 우려도
박재욱 신라대 행정학과 교수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장 현실적으로 이상적인 정치 체제는 다수의 중산층이 지배하는 혼합정 국가였다. 그는 선동정치에 휘둘리는 아테네 민주정의 혼탁성을 개탄하며 중산층 중심의 정치가 자리 잡길 소원했으며, 공화국의 주체는 귀족도, 빈민도 아닌 중산층이 다수여야 했다. 맹자 역시 ‘항산 없이는 항심도 없다(無恒産因無恒心)’는 말로 기본적인 재산 없이는 제대로 된 판단과 인심이 나올 수 없으며, 정치적 안정과 통합을 위해서는 오늘날의 중산층을 육성할 것을 역설했다.
우리의 경우 5공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화를 이룬 기저에는 경제성장으로 두터워진 중산층의 민주 세력화가 큰 몫을 했다. 5공 아래서 성숙한 중산층이5공 독재를 허물고 이후 민주화가 제도화·공고화되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우리사회 중산층의 주요 부분을 이루는 자영업자의 동태가 심상찮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 5월 말 국내 은행에서 취급한 자영업자 대출연체율이 0.69%로 9년 6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단순한 경기변동에 따른 일시적 대출 연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다. 이와 더불어 자영업자의 폐업신고 건수도 2007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치이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사업을 접고 폐업 신고를 한 사업자는 98만6000여명으로, 관련 집계 시작 이후 가장 많은 수치이다. 올해 역시 문을 닫는 자영업자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특히 부산지역의 1인 자영업자 증가율은 전국 평균보다 5배나 많다.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1인 자영업자 증가율이 가장 높다. 1인 자영업자가 큰 폭으로 는다는 건 직원 없는 영세 자영업자로 전락하거나 사실상 폐업을 했다는 의미이다. 자영업자의 소득도 매년 평균적으로 하향 추세이며 자영업 창업 생존율 역시 10년 생존율이 겨우 15%에 불과하다.
중산층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술적 용어는 아니다. 경제학적으로 중위 소득 50~150%에 속하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중산층이라 부른다. 소득이 적은 빈곤층이 중산층이 될 수 없는 사회구조나 제도라면 심각한 위기징후라고 보아야 한다. 계층 상승의 기대감이야말로 사회적 안전망 중 가장 중요한 안전망이다. 중산층 붕괴에다 저출산·고령화 위기까지 겹치면 사태는 더욱 복합적 위기로 확대되고 만다. 교육과 노동 개혁, 그리고 복지 투자로 중산층의 유지와 확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중산층은 직장 소득 자산 등에서 안전성을 보장 받지 못할 때 경제적 몰락에 앞서 심리적 불안으로 와해되기 시작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 이면에는 중산층의 몰락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다. 미국 중산층 가구의 비율이 지난 40여 년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1971년 약 61%를 차지하던 것이 2015년 당시 50% 이하로 추락했다. 소득과 부의 재분배가 부유층으로 집중되고, 빈곤층이 확대되는 양극화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뚜렷한 기술이 없거나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이 빈곤층으로 하락하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이 한때 하층 중산층의 일부였던 러스트벨트 지역 백인노동자계급이 트럼프의 정치적 지지자로 돌아선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세제 개편도 중산층의 위기 문제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 원래 세금이란 이념과 정치의 주요 논쟁거리이다. 최근 논란 중인 종합부동산세가 폐지될 경우 지방소비세율 등의 인상이 아니라면 재산세율의 급격한 인상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서민이나 중산층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피해자도 등장한다. 바로 지방자치단체들이다. 종부세는 전액 부동산교부세로 전환되어 지역으로 배분되는 주요 이전 재원이므로 재원 보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지자체 재정에 타격을 입혀 지방소멸 위기 역시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한편, 내년 실시될 금융투자소득세의 부과 대상자도 주식 투자자 중 1% 정도로 추산되어 얼핏 보면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주식의 ‘큰 손’들이 조세 회피처를 찾아 미국 증시로 ‘주식 이민’을 가게 된다면 한국 증시의 유동성은 줄게 되어 결과적으로 과세 대상이 아닌 개미 투자자들만 직격탄을 맞게 된다. 개미 투자자 상당수는 우리 사회의 중산층에 속한다. 여러 논란이 있겠지만, 부유층 증세와 중산층 감세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할 조세정책이다.
중산층은 경제성장이나 사회적·정치적 통합의 주요 기반이다. 중산층이 불안하거나 몰락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바람 앞에 나부끼는 촛불처럼 위태롭다. 경제적 양극화에 따른 불만과 불안은 지금처럼 서로에 대한 적대감으로 충만한 양극단 정치 현상에 기름불을 부어 향후 ‘정치적 내전’으로 치닫게 될까 두렵다. 중산층은 정치적 안정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주요한 보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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