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고 깎은 반백년, 소목장의 선방에서 비를 긋다 [진옥섭 풍류로드]

한겨레 2024. 7. 2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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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_우중 풍류

마지막 날, 경쟁자들의 작품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그렇구나! 이제 보니 알 것 같다. 빗금은 잘라내란 거고, ‘ㄹ’자 같은 표시는 양쪽을 파 깍지처럼 끼우란 말이구나. 연필로 금을 긋고 총알도 붙잡아 켤 듯이 빠른 톱질을 했다. 순식간에 깎고 끼우고 기름칠해 내니 종이 울렸고 목공예 부문 1위를 하였다.

국가무형유산 소목장 보유자 박명배의 낙동 작업. 낙동은 오동나무를 인두로 지져 닦아내면 봄·여름의 무른 결과 가을·겨울의 굳은 결의 차이가 굴곡지게 깊은 문양을 나타는데 불에 달군 인두로 오동나무의 결을 문지르고 있다. 필자 제공

차창에 장대비가 화살처럼 일시에 날아와 박힌다. 와이퍼를 최고속으로 돌려도 앞이 안 보여 결국 유턴을 한다. “온난화로 뜨거워진 바다가 막대한 수증기를 공급하는 극단적인 기상현상”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폭우가 내린다. 마치 하늘에 흐른다는 ‘대기의 강’이 엎질러져 버린 것 같다. 이 정도라면 업체를 재촉해 공연 현수막을 건다손 쳐도 폭우를 감당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회차도 만만치 않아 비를 긋고 돌아가야 한다.

경기도 용인시의 영산공방, 소목장 박명배 선생의 작업실 앞이다. 소목장은 나무로 장롱, 반닫이, 의장, 책장, 문갑, 서안 같은 가구를 만드는 목수다. 집을 만드는 대목(大木)과 구별해서 소목(小木)이지만, 소용되는 나무는 300년에서 500년 된 아름드리이다. 예부터 이런 연륜 있는 나무를 벌목할 때는 도끼질을 한 후 나무가 쓰러지는 쪽에 저고리를 던져둔다. 도끼질한 놈 깔려 죽었으니, 원한을 풀라는 것이다. 그렇게 훌훌 털고 하산한 나무를 잘 켜서 몇 년을 말린다. 그러다가 오늘 같은 장마에 습기를 머금으며 잠시 늘어나고 있는 거다.

“바쁘실 텐데?” 일을 두고 회차해 애가 타지만, 판소리 사설처럼 담담히 답한다. 거문고를 일컫는 ‘금(琴)’은 본시 사심을 ‘금(禁)’하려 탔기에 선비들의 필수 반려였다. 그래서 다섯 가지의 속된 경우에 타지 않는 “오불탄(五不彈)”이 있다. 그 첫째가 오늘처럼 비바람이 심한 경우이다. 하여 풍류의 법도를 좇아 일을 접고 비를 긋고자 들렀다 했다. “나무도 그래요” 비가 오면 습기가 많아 나무를 만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땅땅’ 철판을 두드려 경첩을 만들고 있었다. 목수가 나무를 잡으면 공예요, 쇠를 다루면 공업이니 속된 일은 아닌 듯했다.

믹스커피를 저어 오며 “또 그 감옥 이야기요?” 한다. 그 감옥이라 말하는 게, 알베르 까뮈의 ‘전락’에 나오는 ‘말콩포르’감옥이다. 서 있을 만큼 높지 않고 누워있을 만큼 넓지 않은 감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각선으로 쓰러질 듯 지내는 지독한 감방이다. 소설에서는 중세 시대에 있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선생이 젊은 날 다녀온 곳이 말콩포르감옥이라 한다. 물론 선생은 소설을 쓰고 있다고 웃는다.

박명배(1950년 생) 선생, 충남 홍성에서 초등학교를 나왔다. 1968년 열여덟에 상경해 목공예실에서 썰고 깎고 기름칠했다. 최회권 교수의 ‘오뉘(오누이) 아틀리에’로, 주로 미술과 학생들의 창작품을 만들어 주었다. 학생 이름으로 발표될 작품이었지만, 점점 정교하게 더 빨리 만들어 갔다. 1971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소식을 들었다. 목공으로 나가 우승하면 일당이 오를 것이었다. 3일간 한 작품만 만든다면 뭐라도 자신 있었다.

그러나 첫날 과제로 나온 도면을 보고 온몸이 쭈뼛했다. 모눈종이로 네모 안에 또 네모가 있고, 그 안에 또 네모가 있었다. 그 위에 연필이 지나갔고 숫자와 선만 있었다. 그간 학생들의 형체를 만드는 그림과 구조를 요하는 도면은 달랐다. 수험생들은 판재에 금을 긋고 일어나 톱질을 하고 있었다. 도면을 읽을 도리가 없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분주한 수험생들이 미동도 없는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봤다. 하루 종일 꼼작 않고 네모 칸을 바라봤다.

다음날도 홀로 앉아 네모 칸을 또 한없이 들여다봤다. 일어서 나가자니 식구들이 생각났고, 앉아 있자니 주변을 지나는 시험관의 눈빛이 써늘했다. 무슨 연고로 이렇게 눈만 끔벅거리며 주저앉았는가? 의혹과 멸시를 겸한 눈빛이었다. 설 수도 앉을 수도 없어 결국 모기장처럼 가는 네모 눈금에 갇히고 말았다. 어디 자신뿐인가, 칸칸마다 가난에 갇혀있는 식구들이 보였다.

어머니는 중학교를 못 간 그 봄처럼 칸을 옮겨 다니며 숨죽여 울었다. 이를 깨물며 버티고 앉아 도면과 수험생들의 작업을 살폈다. 마지막 날, 경쟁자들의 작품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그렇구나! 이제 보니 알 것 같다. 빗금은 잘라내란 거고, ‘ㄹ’자 같은 표시는 양쪽을 파 깍지처럼 끼우란 말이구나. 연필로 금을 긋고 총알도 붙잡아 켤 듯이 빠른 톱질을 했다. 순식간에 깎고 끼우고 기름칠해 내니 종이 울렸고 목공예 부문 1위를 하였다.

마치 영화 ‘쇼생크의 탈출’에서 감옥을 나와 빗속에서 만세 하는 팀 로빈스라 했다. 선생은 이제 영화까지 찍느냐며 ‘씨익’ 웃는다. 얼굴을 다 사용치 않고 눈빛만으로 웃는 ‘씨익’, 그 짧은 웃음 속에 그간의 가파른 시간이 영사기처럼 “촤르르…” 도는 듯했다. 1971년 전국기능경기대회 목공예 부문 1위를 시작으로, 1989년 동아공예대전 대상, 1992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1988년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 지정 및 대통령상, 2010년 국가무형유산 소목장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니, 최초로 전 분야를 석권한 전무후무한 소목장이 되었다.

1992년 제17회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받은 의장. 오동나무에 인두질을 하는 전통 낙동기법을 소나무에 적용한 낙송기법으로 만들었고 현재 서울공예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필자 제공

2008년 나는 선생에게 6개월 정도 소목을 배웠다. 첫 만남부터 첫마디가 도면이었다. 기본이 도면이라 해서, 그리고 또 그려야 했었다. 그러다 누군가 살짝 불평했을 때, 언뜻 전국기능경기대회 이야기를 했다. 순간 세상에 그런 지옥이 있었구나 싶었다. 일이 바빠 배움은 끝났으나 인연은 간헐천으로 흐른다. 폭우로 물이 불어 이렇게 또 문득 나타난 것이다.

“결구와 짜임은 기술, 비례는 예술”이라 했다. 소목은 판재와 각재의 늘고 줆을 최소화해야 한다. 같은 크기라도 한 판보다는 반 판 둘을 잇는 게 더 변함없다. 그러려면 나무와 나무의 치밀한 짜맞춤, 곧 ‘결구와 짜임’이 기술의 핵심이 된다. 허기행의 문하에서 어깨가 빠질 만큼 대패질을 하며 배웠다. 1971년부터 하루에 골백번씩 7년을 반복하자 몸에 박혔다. ‘비례’는 운명적인 스승 최순우를 만나 배웠다. 1981년 당시 국립박물관장으로 최고의 고미술학자이자 문장가였다. 언제나 도면을 그려오라 했고 일일이 수정해 주었다. 그렇게 좌우대칭과 면 분할의 비례미를 깨우쳐 갔다. 또 문화재 제도 이전을 살다 간 옛 분들의 작품도 찾으라 했다. 박물관, 인사동, 장한평을 뒤지며 살았고, 수없는 작품을 도면에 옮겨 담았다. 1984년 최순우의 추천으로 청와대 영부인실에 첫 작품을 넣었다. 그리고 서서히 주문이 들어오는 그해 12월, 최순우는 세상을 떠났다. 연장을 놓고 며칠을 울었다. 후로 운현궁, 로마교황청박물관, 워싱턴한국문화원, 베를린한국문화원 등에 작품이 들어갈 때마다 눈물이 났다.

내가 흠모하던 ‘의장(衣欌)’은 이제 서울공예박물관으로 갔다. 옷을 걸어두는 장인데, 처음엔 문짝을 낙동으로 생각했다. 낙동(烙桐)은 오동나무를 인두로 지져서 닦아내는 기법이다. 그러면 가을 겨울에 만든 근육은 남고 봄여름에 붙은 살은 닦여나가 무늬가 굴곡이 진다. 문득,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본 조선시대 책장처럼 소나무를 쓰고 싶었다. 의장의 문짝을 소나무로 바꾸어 인두로 지지고 닦아내었다. 이 낙송(烙松)기법으로 제17회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탔다. ‘의장(衣欌)’에서 물러서면, 위대한 시간 앞이다. 소나무는 500년 지켜본 진경산수를 제 몸에 탁본해 두었고, 봉우리를 향한 비탈의 근육들이 네 폭의 장쾌한 수묵화로 솟아오른다.

“2025년이요?” 되물었다. 2025년 11월7일부터 예술의전당 전시관에서 <‘반닫이’전(展)>을 한다고 했다. 5년에 1번씩 발표를 했는데, 이제 3년에 1번으로 계획한다는 것이다. “저는 8월1일입니다.” 공연하는 강원도 정선으로 현수막 재촉하러 가다가 폭우를 만나 이렇게 왔다. 공연이 코앞인데, 홍보가 막혀 말콩포르감옥에 실시간으로 갇혀있다고 했다. 비가 그쳤는지 매미 소리가 이명처럼 파고들었다.

“잘 노닐었습니다.” 오동나무 결 속을 걸어 세한도의 초막에서 무현금(無絃琴) 소리를 듣고 간다고 했다. 선생이 또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춤판으로 건너가면, 춘앵전의 극치에서 웃는 미롱(媚弄)이다. 비록 믹스커피지만 그래도 화두가 오간 공방(工房)이니 염화미소가 된다고 했다. 그렇다! 내가 보낸 짧은 짬을 나 아니면 누가 존대한단 말인가. 풍류가 별건가, 잠시 잠깐 빠져들면 별건곤이다. 박명배 선생의 선방(禪房)에서 풍류의 절개를 가다듬고 간다.

진옥섭 |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져들었다. 서울놀이마당 연출로 서울굿을 발굴하면서 ‘무(巫)’에 심취했고, 초야를 돌며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숨은 명인을 찾았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리며 마침내 ‘무(無)’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고, 무대와 마당을 오가며 판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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