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걸 "헌법정신 구현한 국가상징물 없어···미래지향적 공간도 조성해야" [특별인터뷰]
에펠탑처럼 미래가치 고려해 장기적 관점서 기획을
초대형 태극기, 발상은 좋지만 참신함 결여 아쉬워
국민 일상 속 향유하도록 개방된 공간으로 만들길
서울시가 지난달 광화문광장을 국가 상징 공간으로 조성하고 국가 상징물로 ‘초대형 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국가 상징물과 국가 상징 공간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서울시가 광화문광장 중심에 100m 높이의 대형 태극기 게양대 등 국가 상징물 건립 계획을 발표하자 국가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에 국가건축정책위원회와 국토교통부는 서울시에 추진 절차에 대한 시정 요구 공문을 보내 관계부처 및 기관들 간의 협의 테이블까지 마련했다.
권영걸(사진)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은 25일 서울 종로구 집무실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거대한 태극기와 깃대를 세우는 방식, 무궁화 형상을 재현한 조형물과 조경,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작품 이름의 적정성 등에 대해 심도 있는 공론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공급자인 관료, 설계자인 전문가, 향유자인 시민이 공론 과정에 모두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 위원장은 다만 국가 상징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한민국 어디에도 헌법 정신을 구현한 상징물이 없다는 점에서 국가 상징 공간 조성은 꼭 필요하다”며 “그러나 미국 워싱턴모뉴먼트(기념탑)처럼 상징성은 비좁은 공간보다 넓은 개방 공간에서 의미와 효과가 증폭된다는 점에서 이미 많은 상징물이 있는 광화문광장은 국가 상징 공간 장소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대신 “과거가 아닌 신(新)인류의 새로운 관념과 경험까지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미래 지향적 장소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2008년 제1기를 시작으로 출범 16년이 지난 국건위는 건축 정책의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관계부처의 건축 정책을 심의·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다.
-최근 국가 상징 공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국가 상징 공간에 관한 가장 큰 논의 배경으로는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을 꼽을 수 있다. 고려 남경에서부터 이어온 조선의 중심 공간인 경복궁 권역을 떠나 대통령실을 이전한 것은 대통령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와 국토 조직에 대한 구성 체계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계기로 작용했다. 630여 년간 통치자의 공간이었던 엄폐된 한양의 공간에 머무르는 한 조선의 상상력을 뛰어넘지 못한다. 대통령실 이전을 통해 그동안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도시 구성 체계를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형태로 전환할 정신적 여유가 생겼다.
-국가 상징 공간은 어떤 공간이고, 어떻게 추진돼야 하나.
△국가 상징 공간은 국격을 대표하는 최상위의 공간으로, 대한민국이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자의식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적 공감대를 토대로 나라의 역사적·문화적·시대적·장소적 가치를 현대적 감각으로 구현해야 한다. 아울러 주변으로부터의 접근성을 강화하고 어디에서나 조망할 수 있는 시각적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또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정책으로 국격과 국정 가치가 반영된 대표 공간이자 시민들이 삶의 질 향상을 직접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 조성 과정은 개방적으로 운영돼야 하고 국민 소통과 민간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국가 상징 공간의 지위를 얻으려면 어떤 공간 조건이 필요한가.
△국가 상징 공간의 유형으로는 먼저 역사·관광·교육의 거점이거나 광역 교통 인프라 등 역사적 상징성을 가진 ‘역사 거점형’ 공간이 있다. 두 번째로는 녹지·하천·묘역 등으로 지역 정체성과 결부되거나 보훈이나 추모의 기능을 가진 ‘공원 광장형’ 공간을 상정할 수 있다. 세 번째로는 국가나 지역을 대표하는 기술·문화·인프라가 집약된 ‘문화 자산형’ 공간이 있다. 공간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위상을 강화하는 ‘국가적 가치’,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지역적 가치’, 대한민국을 브랜딩해 글로벌 선도 국가로서의 위상을 정립하는 ‘국제적 가치’를 가질 때 국가 상징 공간으로 선정될 수 있다.
-한국은 그동안 국가 상징 공간을 조성하지 못했는데.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쳐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산업화·민주화·정보화 과정을 경험하면서 전 세계가 놀랄 만한 발전을 이뤘음에도 대한민국은 국가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적 공간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과거 지향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이 컸다. 14세기 조선 개국 이후의 몇 가지 역사적 전례와 사건에만 집중하는 것을 반성해야 할 때다. 고려와 통일신라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서울이 현행 헌법상 한반도의 전토(全土)를 영토로 하는 대한민국 수도인 만큼 다양한 역사·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공간 구현이 필요하다.
-광화문광장의 초대형 태극기 게양대는 국가 상징물로 적절한가.
△광화문광장은 연간 2000만 명 이상의 내외국인이 찾는 상징성이 높은 공간이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 관점에서 국가 상징 공간으로서의 입지 중요성에 대해 이견이 없다. 태극기를 소재로 한 테마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서울시의 기본 발상은 좋다. 다만 기획에서 서둔 느낌이 있고 제안에서 참신함이 결여돼 있다. 광화문광장에 거대한 태극기와 깃대를 세우는 방식과 무궁화 형상을 재현한 조형물과 조경을 하는 것, 그리고 꺼지지 않는 불꽃의 적정성 등에 대해서는 더 깊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광화문광장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인가.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나 로마의 포럼에서 시작된 ‘광장’은 원래 ‘무규정성’을 기본 속성으로 하는 공간이다. 다양한 기능을 담을 수 있는 그저 빈 공간이다. 콩코르드광장·트래펄가광장·톈안먼광장 등 유럽 구시가지 광장 대부분은 가로수나 벤치 없이 그냥 비워져 있다. 광화문광장은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 등 조선 시대 기반의 상징물로 채워져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구현한 상징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근대에 치우쳤던 우리의 문화적 타성을 극복하고 이제는 근대로 가자는 서울시의 취지에 동의한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맞다. 그러나 광화문광장에 태극기를 테마로 한 공간이 조성된다면 현재의 수많은 요소 중 상당량을 제거하고 비워내야 한다. 워싱턴모뉴먼트처럼 상징성은 비좁은 공간에서보다 넓은 개방 공간에서 그 의미와 효과가 증폭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광장에 무엇인가를 가득 채우려고 하나.
△우리나라의 도시계획관은 ‘광장’ 중심이 아니라 왕성(王城)을 기점으로 한 주작대로(朱雀大路)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빈 공간에 계속해서 새로운 부속물을 넣어 장식해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현재 광화문광장이 단순하게 성격을 규정하기 힘든 공간이 된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세계 도시의 국가 상징 공간은 어떻게 국민 합의에 이를 수 있었나.
△세계 도시들과 특히 수도에는 모두 국가 상징물, 상징 거리, 상징 거점 공간이 있다. 공간이 조성될 때마다 여론이 비등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파리 시민들은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에펠탑을 비난했고 흉물처럼 여겼다. 그러나 1차 대전을 거치면서 도시를 전화(戰火)로부터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는 재평가를 받았다. 또 시민들이 석조 건축물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에 철골 건축물이 보여준 기계 미학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에펠탑은 파리와 프랑스를 상징하는 국가 상징이 됐고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국가 상징 공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가치의 변화까지 고려하는 원시안으로 기획되고 추진돼야 한다.
-국가 상징 공간은 미래의 가치를 아우를 수 있나.
△요즘은 정보기술(IT) 기반의 가상현실 및 증강현실 때문에 모든 공간이 콘텐츠로 받아들여진다. 콘텐츠화될 수 없는 물리적 공간은 구태 또는 ‘올드 패션’으로 치부된다. 국가 상징 공간은 무수한 데이터와 기기의 연결로 인해 사고 회로 자체가 바뀌어 버린 신인류의 새로운 관념과 경험까지를 고려한 결과물이 돼야 한다. 과거의 문화유산에서 콘텐츠를 길어 올리지만 반드시 미래를 향한 창신(創新)의 힘이 있어야 한다. 서울시가 최근 인스타그래머블한 장소를 만드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고민이라고 본다. 전 세계인이 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매체에 공개됐을 때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고 확산될 수 있는 콘텐츠를 찾아 실체화해야 한다. 국가 상징 공간을 역사적 유물처럼 바라만 보는 대신 미래를 살아갈 국민이 일상 속에서 즐기고 누릴 수 있는 개방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 상징 공간이 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국민 합의를 거쳐 조성된 국가 상징 공간은 어떠한 독재자가 나온다고 해도 변경이 불가능하다. 한 번 조성된 상징물과 상징 공간은 변경이나 이전·폐기 등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서울의 국가 상징 공간이 전국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서울의 도시 공간 체계의 변화는 지방 소도시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전국 도시들이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구성 체계로 변화하는 것을 주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가 녹지의 연결망이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가 가진 풍부함은 도시 인프라이고 부족한 부분은 녹지다. 지방으로 갈수록 부족한 것이 도시 인프라이고 풍부한 것이 녹지다. 이처럼 녹지를 매개로 대도시와 지방을 연결하는 체계는 각 지역이 갖고 있는 인적·물적 자산을 효율적으로 공유하고 활용하게 하는 국가적 인프라다. 서울 중심의 국가 상징 공간 구축 이후 이어질 전국 지역의 상징 공간 조성은 대한민국 전역에 통합성을 부여하는 국가전략이 될 것이다.
◆He is···
1951년생으로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디자인학 석사, 고려대에서 건축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미대 학장과 서울시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부시장), 계원예술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과 지난해 3월 출범한 대통령 직속의 제7기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신미진 기자 mjshin@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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