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와 분단 맞서 온몸 던진 39살 불꽃 생애

한겨레 2024. 7. 2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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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 이범영 의장 30주기를 추모하며

1994년 2월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제3기 총회에서 의장 이임사를 하는 고인. 유족 제공

서울법대 졸업 앞둔 1976년 말
필자와 학내시위 이끌고 구속 뒤
희희낙락하던 모습 눈에 선해
암으로 짧은 생애 마칠 때까지
오로지 민주화·통일운동 헌신
세차례 구속과 세차례 수배
민청련과 한청협 의장 등 지내

내달 10일 마석 모란공원 추모제

“태어날 때도 내 의지대로 태어난 것이 아닌데, 죽고 사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겠지.” 이범영 의장은 1994년 6월 암이 재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필자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이전까지는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였는데, 이번 수술을 받고서 며칠 동안은 번뇌에 시달렸다며 이제는 평온한 마음이 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일이 눈앞에 확인되어서 황망하고 처연한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이승에서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절, 대학 졸업시험도 끝난 시점인 1976년 11월 말 이범영은 당시 미국에서 이슈였지만 언론 통제로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던 ‘박동선 뇌물사건’의 전말을 필자와 백계문에게 알리면서 유신헌법 철폐와 긴급조치 해제, 그리고 뇌물사건 진상공개를 요구하는 학내시위를 제안했다. 서울법대 4학년 동급생 셋(이범영, 백계문, 필자)이 의기투합해 몇 번 만나면서 시위 날짜는 12월8일로 정해졌다.

그날 시위는 기습적으로 시도되어 계획대로 성공했다. 애초 계획한 대로 우리 셋이 시위 책임을 모두 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고, 후배들은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당시 현장에서 함께 체포되어 조사받는 내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던 이범영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감옥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시범을 보인 투쟁방식이 박정희가 심복에게 암살당할 때까지 2~3년 끈질지게 지속되면서 확대 재생산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인이 1986년 수배를 받아 쫓길 때 용문사에서 부인 김설이씨와 두 딸(건혜, 승민)을 만나 찍었다. 네 식구가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이라고 한다. 유족 제공

광주민중항쟁 이후 엄혹한 시절인 1983년 9월에 반공개 민주화운동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결성되었다. 초대 의장은 김근태 선배가 맡았다. 학생운동 출신의 선진 활동가들로 구성된 민청련은 옴두꺼비를 조직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산란기의 옴두꺼비는 뱀을 만나면 피하지 않고 싸움을 건다는데, 뱀에게 잡아먹힌 옴두꺼비는 혼신의 힘을 다해 뱀의 몸 안에 알을 낳고 그 알에서 깨어난 수십 수백 마리의 새끼두꺼비들이 뱀의 몸을 파먹으며 성장하게 되고 결국 뱀은 죽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선진활동가들의 선도적 정치투쟁과 헌신이 역사의 전진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범영은 민청련 창립 당시 민청련 집행국장으로, 또 나중에는 정책실을 책임지는 부의장으로 헌신한다. 창립 2년도 지나지 않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가혹한 탄압으로 김병곤 선배와 김근태 선배 등이 구속되고, 이범영은 수배 상태에 들어가는데, 이범영은 수배 기간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글을 쓰고 조직화를 추진해 나간다. 특히 “(민주화)운동을 하겠다면 설렁설렁해서는 안 되며,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3차원에 걸쳐 운동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1985년)는 3단계 헌신론을 설파하면서 앞장서 실천해 나갔던 전설적 일화도 있다.

1987년 6월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열린 공간에서 이범영은 1988년 9월 민청련 의장에 취임한다. 이범영은 정세의 변화발전 상황에 조응해서, 청년운동이 중간층 출신의 지식 청년들 중심의 선진활동가 조직 운동에서 노동청년 등 기층 청년을 주요한 조직기반으로 하는 회원 중심의 청년단체로 개조되어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청년 대중단체로의 전환과 청년조직의 전국화를 추진하게 된다. 그 성과로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를 1989년 1월에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한다.

1982년 10월 김승훈 신부를 주례 사제로 모시고 고인은 김설이씨와 혼배성사를 치뤘다. 고인은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유족 제공

그는 1991년 이른바 분신 정국에서 분신 자결이 연이어 결행되자, 너무나 안타까워하면서, “비분강개하여 자결하는 것보다 살아남아서 끈질기게 투쟁하는 일이 더 어렵고 값있는 것”이고 “참다운 투사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전에는 죽을 권리도 없다는 자세로 전투적으로 살아야 한다”(이범영 글 ‘우리의 영원한 청년투사 김병곤 동지’)고 역설하였다.

우리 현대 역사상 질풍노도 시대라 할 1980년대 중후반기 이후 이범영은 본격적인 통일운동에 나선다. 저서 ‘90년대 청년운동론’(1990년)에서 이범영은 청년운동을 세대 특성에 기초한 사회적 계층운동이자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대중운동”으로 자리매김할 것을 주창한다. 1992년 2월에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가 결성되고 이범영은 의장에 취임하는데, 그의 제안에 따라 한청협은 조직의 과제 겸 임무를 “겨레의 희망, 민중의 벗”으로 표상하게 된다.

이범영은 30년 전인 1994년 8월12일 만 39살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날 때까지 모두 3차례 구속과 3차례 수배 생활을 반복했다. 대학에 입학한 이래 20년 전 생애 동안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반독재민주화운동과 민족의 화해와 협력에 기반한 민족통일운동에 헌신했다. 그 길에는 사회적 명예와 지위, 그리고 자신과 가족의 일상생활도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사실 그는 어떨 때는 순진하다고 느낄 정도까지 사심이 없는 사람이다. 탁월하지만 자기를 내세우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또 여느 투사들처럼 강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다. 도리어 다정다감하고 부드러운 성품의 사람인데, 우리 역사가 그를 불굴의 투사로 만들어 내었다. 그는 하모니카도 잘 불었다. 모임에서 그가 부르는 가곡 수선화를 듣노라면 듣는 사람의 영혼까지 맑아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는 대학 다닐 때 농촌법학회 활동을 하는 외에도 가톨릭학생회 활동도 하고 천주교 세례도 받았다.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몸 바친 영혼들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고인의 어머니 홍정숙 여사의 기도가 절실하다.

순결한 영혼, 이범영 의장의 30주기를 추모하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고인의 30주기 행사는 내달 10일 오전 11시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서 열린다. 오후 4시에는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추모 문화제를 한다.)

박석운/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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