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민들이 밝혀낸 사도광산 강제동원 [특파원 칼럼]

김소연 기자 2024. 7. 25.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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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지난 21일부터 인도 뉴델리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강제동원이 대규모로 이뤄졌던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지가 한-일 사이에 쟁점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노골적으로 피하려고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대상 기간을 에도시대(1603~1867)로 한정하는 꼼수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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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주변에는 80여년 전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광산 뒤쪽 빈터에 돌무더기가 쌓인 곳이 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이 매일 밥을 먹던 식당 자리다. 안내판 하나 없이 휑한 모습이다. 사도/김소연 특파원

김소연 | 도쿄 특파원

제46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지난 21일부터 인도 뉴델리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강제동원이 대규모로 이뤄졌던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지가 한-일 사이에 쟁점이다. 등재 여부는 이달 26~29일 사이에 결정된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노골적으로 피하려고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대상 기간을 에도시대(1603~1867)로 한정하는 꼼수를 썼다. 하지만 유네스코의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가 제동을 걸었다. 지난달 이코모스는 사도광산과 관련해 “세계유산 목록으로 고려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면서도 여러 지적 사항을 붙여 보류를 권고했다. ‘조선인 강제동원’에 대한 내용도 그중 하나다. 이코모스는 “광업 채굴이 이뤄졌던 모든 시기를 통해 추천자산(사도광산)에 관한 전체 역사를 현장에서 포괄적으로 다루는 설명 및 전시 전략을 수립하고, 시설 및 설비 등을 정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등재 과정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한국 쪽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 정부는 줄곧 “강제동원이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약하다. 사도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는 한국 쪽이 아닌 일본 시민사회가 밝혀낸 성과다. 33년 전인 1991년 8월 재일동포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섬에 있는 절 ‘쇼코사’의 하야시 미치오 스님이 ‘사도광산 조선인 연초(담배) 배급명부’를 확보하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태평양전쟁 당시인 1944~1945년 미쓰비시광업 사도광업소가 광부들에게 담배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만든 이 명부에는 조선인 400여명의 이름·생년월일 등이 적혀 있었다. 하야시 스님과 지역 사람들은 1991~1995년 세번이나 한국을 방문해 사도광산에서 일했던 피해자를 직접 찾아냈다. “도망갔다가 잡힌 사람이 두들겨 맞는 것을 봤다”, “지역에서 (데려갈 사람의) 할당이 있다고 해 사도로 끌려왔다”, “항상 배가 고팠고, 통제를 받았다” 등 그들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피해자들의 증언뿐만 아니라 사도광산 회사 쪽이 작성한 각종 자료, 일본 정부·경찰이 만든 공문서, 니가타현의 문헌 등 조선인 강제동원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태평양전쟁(1941~1945)이 시작되자 사도광산에선 금뿐만 아니라 군사 물자에 필요한 구리·아연·납 등을 집중적으로 채굴하기 시작했고,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식민지였던 조선의 노동자 1500여명이 동원됐다. 일본 지방정부인 니가타현이 1988년 펴낸 ‘니가타현사 통사편8 근대3’엔 “1939년에 시작된 노무동원 계획은 명칭이 모집, 관 알선, 징용으로 바뀌지만 조선인을 강제로 연행한 사실은 동질”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30여년 전 한국을 오가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조사를 주도한 하야시 스님을 2022년 8월 사도섬에서 만났다. 그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봐야 한다. 도망치면 안 된다”며 “조선인 강제동원 등 전쟁 책임 문제는 인간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우리 일본인들이 계속 추궁받아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하야시 스님은 지병이 악화돼 올해 3월 77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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