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에 선화공주 역 낯 간지럽지만…죽기 살기로 해야지"

오보람 2024. 7. 2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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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극 1세대 조영숙 명인, 제자들과 '조 도깨비 영숙' 공연
장영규·박민희 연출…"국극이 뭔지 경험할 기회 드릴 것"
'조 도깨비 영숙' 무대 서는 국극 1세대 조영숙 명인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아야, 사내새끼처럼 좀 해라! 무대에선 목숨을 걸고 해야 해."

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조 도깨비 영숙' 공연 리허설 중이던 여성국극 배우 한혜선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객석까지 소리가 전해질 정도로 호통을 친 이는 국극 1세대 배우 조영숙(90) 명인. 검은 머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백발에 허리는 90도 가까이 굽었지만, 목청만큼은 20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그는 오는 26∼27일 이곳에서 제자 박수빈, 변민지, 한혜선, 황지영과 함께 공연을 선보인다. 밴드 이날치의 베이시스트 장영규와 정가 가수 박민희가 국극 '선화공주'를 현대적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조 명인은 서동 왕자와 선화공주, 석품, 철쇠, 왕 등 5명의 배역을 맡는다. 10대 시절부터 무대에 올랐던 조 명인이지만, 1인 5역에 도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리 촬영한 영상과 라이브 무대를 결합해 물리적 한계를 극복했다. 조 명인이 스크린 속에서 다른 역할을 소화하는 자기 모습을 보며 연기하는 방식이다.

"자꾸 옛날에 하던 게 튀어나와. 어휴…"

항상 사람과 마주하며 연기하던 그는 이런 변화가 어색한 듯 연습 도중 동선이나 시선 처리에서 자그마한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머리나 뺨을 살짝 때리며 자책했다.

그러나 연출의 사인이 떨어지자 다시 연기에 몰입한 그는 무조건 반사처럼 창을 시작하고 대본에 없던 애드리브로 제작진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조 도깨비 영숙' 무대 서는 국극 1세대 조영숙 명인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90살 넘은 선화공주가 어디 있대? 늙고 목소리도 굵어지고 허리는 낚싯바늘 같아졌는데, 분장까지 하고 하래. 낯 간지럽게. 그래서 나는 처음엔 못한다고 했는데…"

대기실에서 만난 조 명인은 "26일은 내가 태어나 처음 선화공주 역을 맡는 역사적인 날"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극에서 남성 역할을 맡아온 그는 수천번 공연한 '선화공주'에서도 남자 캐릭터만 소화했다. 이번 공연을 통해 그는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공주 옷을 입은 채 난생처음으로 선화가 된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아이고' 소리를 연발하는 조 명인은 지팡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쉽사리 걷지 못한다. 그런데도 도전에 나서는 건 국극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젊을 적엔 객석에서 손뼉 쳐주고 잘한다고 하니 그저 좋았지요. 나중에는 스승이신 임춘앵 선생님 당부처럼 우리 국극이 참으로 귀한 예술이니 없어져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머릿속엔 '국극을 살려야 되는데' 생각밖에 없었어. 이게 마지막 무대라 생각하고 온 정성을 다하려고 해요."

조 명인의 아버지는 판소리 명창 조몽실이고 할아버지는 줄타기와 대금의 명인 조종엽이다.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태어난 딸마저 예인으로 키우고 싶지 않다며 조 명인을 북한 원산사범학교로 보냈다.

그러나 조 명인은 학생 시절부터 연극을 하고 6·25전쟁으로 월남한 뒤에는 광주 여성국극동지사에 입단하며 국극 배우가 됐다. 이후 가는 곳마다 구름 인파의 팬들을 끌고 다니는 스타 중의 스타로 거듭났다.

'조 도깨비 영숙' 연출하는 장영규 음악감독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하지만 국극은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까지의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하고 1960년대 들어 급격히 쇠락했다.

최근 인기 웹툰 '정년이'와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 덕에 이전보다는 대중의 주목을 받고는 있지만, 여전히 소수 예술 장르로 인식된다.

국가무형유산으로 등록되지 않아 조 명인은 국극이 아닌 발탈(발에 탈을 씌우고 하는 재담과 소리) 보유자로만 지정됐다.

장영규 연출은 "선생님(조 명인)은 국극의 인기가 높던 1950년대 누구보다 아이돌 같던 분이었다"며 "반면 지금 국극은 전통예술 분야에서도 마이너하기 때문에 국극의 '극과 극'을 다 경험하신 셈"이라고 말했다.

"(예술이) 사라질 때가 되면 사라지는 게 자연스러울 순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그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버려지는 것과 사람들이 보고 난 다음에 취향에 맞지 않아 선택받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국극이 좋은지 싫은지를 경험이라도 해 볼 기회를 드리고 싶어요."

그는 오는 10월 방송 예정인 드라마 '정년이'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국극과 연을 맺었다. 국극과 관련한 내용을 자문하는 과정에서 조 명인도 만나게 됐다. 장 연출과 함께 드라마에 참여하는 박민희 역시 이런 인연으로 '조 도깨비 영숙'을 공동 연출한다.

박 연출은 "선생님께는 파격적으로 다가올 만한 것들을 많이 시도하고 있다"면서 "과연 이걸 이해해주실까 걱정하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모두 이해해주시더라"며 웃었다.

그는 "한국 사회에 번진 많은 혐오 가운데 노인 혐오도 있지 않으냐"며 "사람은 누구나 늙고, 나이가 들어서도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을 멋지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박민희 연출, 조영숙 명인, 장영규 연출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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