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도, 사춘기 아이도 같이 살기 쉽지 않네

김은형 기자 2024. 7. 2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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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영화 ‘타샤 튜더’ 중 한 장면.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몇년 전 한국의 타샤 튜더가 될 것처럼 오두방정을 떨며 식물 키우는 기쁨에 대해 쓴 적이 있다. 팔랑귀 소지자로서 이사하며 플랜테리어 유행에 동참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볕이 잘 들어서인지 선인장을 죽이던 똥손의 베란다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식물들이 쑥쑥 자랐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우리 집 베란다는 1초 컷 타샤의 정원이다. 언뜻 보면 방치된 자연 같지만 들여다보면 내적 질서와 리듬을 가지고 야생의 풀과 꽃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는 타샤의 정원에서 ‘언뜻 보면 방치된 자연’까지만 비슷하다는 말이다. 왜냐. 진짜로 방치됐기 때문이다. 방치된 자연은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방치된 열댓 개의 화분은 초라하기만 하다.

요즘은 플랜테리어 유행으로 젊은 ‘식집사’들도 많아졌지만 전통적으로 식물 키우기는 중장년층의 취미생활이다. 1~2년 식물 키우는 즐거움을 느끼며 왜 나이 들며 텃밭이나 식물 키우기에 빠져드는지 알게 됐다. 그때 내가 친구들에게 가드닝 포교를 하면서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내 뜻대로 되는 건 식물밖에 없어”였다. 물을 주고 들여다보면 파란 잎을 쑥쑥 키우며 열심히 자란다. 재워주고 입혀주고 밥만 주면 쑥쑥 자라며 부모에게 기쁨만 주던 아이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지난해 가드닝에 대한 애정이 급냉각되며 친구들에게 하소연한 건 “식물조차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였다. 손바닥만한 화분에 실려 우리집에 왔을 때는 그저 잎이 하나 더 돋고 키가 자라는 것만으로 무한 기쁨을 줬다. 그런데 크기가 어느 정도 자라면서 수형을 만들어줘야 할 때가 됐다. 가드닝의 난이도가 확 높아진 것이다. 사춘기 육아처럼 말이다.

옆으로 가지가 퍼져나갈 생각은 안 하고 멀대같이 키만 크는 덴드롱, 지지대를 세워주지 않으면 술 마시고 길에 뻗은 만취자처럼 널브러지는 몬스테라, 흰 꽃망울을 잔뜩 머금어 사람 설레게 해놓고 갑자기 후두두 꽃망울들을 떨어뜨린 천리향까지 식물들은 나에게 마치 대단한 인생의 교훈이라도 주겠다는 듯이 각자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수형을 만든다는 건 사춘기 자식을 키우는 것과 비슷한 일일까? 요즘 나에게는 약간의 공통점이 느껴진다. 일단 수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 물과 햇빛과 가끔의 영양제만으로 자라는 시기는 끝이 난 것이다. 수형을 만드는 건 작위적이지 않은가라고 반문하실 분도 계실 것이다. 식물을 키워본 적 없거나, 수천평짜리 야산을 정원으로 가지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사실 나도 가지와 잎을 동그란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다거나 하는, 예쁘지만 인공미가 지나친 식물들을 보면 좀 거부감이 든다. 또 제멋대로 나는 가지를 자르기 전에 망설이게 된다. 새잎을 틔우려고 애를 쓴 식물의 노력을 외면하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든다.(이렇게 공감능력이 좋은데 왜 F가 아닌 건가.) 하지만 타샤 튜더같이 시골에 넓은 땅을 일구는 것도 아니고 좁은 베란다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화분들이 방치된 우리집 베란다.

육아를 하는 과정에서도 항상 나는 망설이면서 조금씩 굼뜨게 움직이다 후회를 했다. 벌써 학원을 보내야 하나, 뭘 저렇게 시켜야 하지 하다가 아이 친구들이 모두 바빠진 다음에야 부랴부랴 전화를 돌려 뭘 시킬지, 어디를 보낼지 찾아 헤맸다. 사교육을 비판하고 공부는 아이가 원할 때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분들 최소 일하는 엄마는 아니다. 아이가 하도 학원 숙제를 안 해서 학원을 그만 둔 적이 여러 번 있는데 그 남는 시간과 감당해야 할 과제들은 고스란히 엄마 아빠 몫으로 떨어졌다.

학원에 전기료 내주러 다닌다는 표현이 있다. 학원에서 공부는 안 하고 돈만 버린다는 이야기다. 나 역시 그런 걸 보면 혀를 찼지만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학원에 전기료 내주러 다니는 게 뭐 어때서! 적어도 그 시간에 소파에서 정지 자세로 스마트폰 게임만 세 시간 내리 하거나 이로 인해 부모와 전쟁을 벌이지도 않고, 친구들과 함께 편의점 군것질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럼 된 거 아닌가 말이다. 하고 싶은 걸 시키라고? 식물에 너는 어떤 수형으로 자라고 싶냐고 물어서 답변을 듣는 편이 더 빠를 거 같다.

무덥고 습한 여름, 비가 오면 어떻게 될 거라는 심정으로 물도 제대로 안주며 화분들을 방치하고 있다. 잘 자라다가 가지들이 거의 모두 말라죽었던 금전수는 방치 속에서 새로운 가지가 하나 자라나 왔다. 까다로움 안 피우면서 알아서 잘 크던 홍콩야자는 갑자기 기력이 쇠하며 잎들이 노랗게 말라가고 있다. 중2 아이는 방학한 뒤 점심 때쯤 인간으로 일어나 서서히 해가 중천으로 가면 원숭이로, 떨어지면 악마로 바뀌었다가 새벽 1시가 넘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삶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밤 11시면 집을 뛰쳐나와 정처 없이 동네를 걸으면서 갱년기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짧은 여름방학이 지나면 우리 집 베란다는 또 어떻게 바뀌어있을지, 우리 집 거실의 바닥이 찍힌 자국은 몇 개가 늘어날지 궁금하다.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는?

‘너도 늙는다’의 시즌2를 온라인에서 시작합니다. 더 솔직하고 더 유쾌하고 더 괴로운 노화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갱년기 엄마의 사춘기 아들 ‘사생결단 유혈육아’도 부끄럼없이 쓸 예정입니다. 아들아! 너도 늙는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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