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 청년’ 이성태는 왜 동지들을 고발했나
도대체 김춘성(金春成)은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국제공산당과 소련 정부 기관에 고발한 행위 말이다. 그는 모스크바 조선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김단야를 음해하는 고발장을 썼다. 1937년 9월28일자였다.
무서운 시절이었다. 스탈린 집권기 ‘대숙청’이라 부르는 국가폭력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인민의 적’으로 지목된 사람은 비밀경찰 기관인 내무인민위원부 요원들에게 가차 없이 체포당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가족에게조차도 안위와 소재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소련 전역에 걸쳐 수백만 명이 피해를 봤다. 조선인만이 아니다. 러시아인은 물론이고, 재소련 독일인, 폴란드인, 핀란드인이 특히 큰 피해를 봤다. 국가폭력이 절정에 달한, 1936년 10월1일부터 1938년 11월1일까지 2년 동안에 156만5천여 명이 체포됐고, 이 가운데 85%에 달하는 133만여 명이 유죄 선고를, 그중 66만8천여 명이 사형 선고로 목숨을 잃었다.
2년 동안 66만8천여 명 사형
김춘성의 고발장은 4쪽에 걸쳐 러시아어 타자본으로 작성됐다. 첫머리에는 문서 작성 이유와 정보 출처를 언급했다. 자기는 소련에 망명한 이래 조선 혁명과 연계가 단절됐지만, 여전히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바라므로 이 글을 작성한다고 썼다. 일부 정보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서 얻었고, 다른 일부는 조국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현역 조선인 동무들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한다. 앞뒤 모순이 있다. 조선 혁명과 연계가 단절됐다는 말과 조국에서 활동 중인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얻었다는 말은 상충한다. 하지만 김춘성은 그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에 구애받지 않고 거침없이 문장을 이어나갔다.
9개 항목이었다. 김춘성이 지목한 김단야의 범죄 혐의 말이다. 1919년 3·1운동 때부터 김단야는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동지들을 경찰에 팔아넘겼다고 한다. 어쩌다 감옥살이하더라도 매우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김단야가 관련을 맺은 비밀결사는 1925년, 1929년에 각각 큰 탄압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경찰의 검거망을 무사히 빠져나갔다고 한다. 경찰과 내통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춘성은 김단야의 가까운 동지들도 밀정 혐의가 있노라고 썼다. 맨 먼저 박헌영이 지목당했다. 당 중앙 지도자인데도 그의 지도하에 활동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낮은 형을 선고받았다고 적었다. 경찰과 내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김한도 거론했다. 1932년 모스크바 망명 중 소련 경찰에 체포된 김한은 오래전부터 밀정임이 입증된 자인데, 김단야는 십수 년간 그의 가까운 정치적 동료로 지냈다고 썼다.
김춘성은 누군가? 조선인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장기간 투옥과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투서를 서슴없이 작성하다니,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 이름은 가명이었다. 그의 본명은, 고발장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이성태(李星泰)였다.
이성태는 열혈 청년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기독교청년회(YMCA) 경성청년학관에서 영어를 배우는 중등교육기관의 열여덟 살 학생이었다. 3월1일 운동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10개월간 감옥에 수감됐다 풀려난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식민지 조선을 해방하기 위해 혁명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의 여러 정치세력 가운데 안창호 그룹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 상하이임시정부의 첫 국무총리 서리인 안창호는 그 시절 일기를 남겼는데, 1921년 2월4일치 기록에 이성태가 등장한다.
그날 이성태는 안창호, 이광수, 선우혁 등 5명과 함께 한국 임시정부와 중국 베이징 정부 사이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는 사안을 협의하는 자리에 합석해 있었다. 이성태가 비록 나이는 적지만 임시정부의 내밀한 일을 논의하는 자리에 배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개벽> 등에 문제적 기사 기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흥사단원이었다. 예컨대 안창호는 통상단우(정회원) 4번, 이광수는 103번, 선우혁은 169번이었다. 이성태는 통상단우가 아니므로 고유번호는 부여되지 않았지만, 이미 예비단우 자격을 갖고 있었다. 통상단우가 되려면 소정의 기간과 절차를 더 거쳐야 했다. 그런 절차 가운데 하나가 입단 문답이었다. 이성태는 그로부터 6일 뒤인 2월10일에 안창호 주관하에 문답을 거행했는데, 그날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이성태는 말 잘하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재능을 이론과 선전 분야에서 발휘했다. 그는 망명지 상하이에서 언론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광수가 사장 겸 주필을 맡은 <독립신문> 기자를 지냈다. 뒷날 이광수는 상하이 시절을 회고했다. “이성태는 제주도 청년으로서 분홍빛 나는 앵무조개 하나를 선물로 가지고 제주도로부터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이광수는 1892년생이고, 이성태는 1901년생이었다. 두 사람은 아홉 살 차이가 났는데, 이성태는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매우 친숙한 사이가 됐다. 이즈음 이성태는 사회주의에 강력한 매력을 느끼고 그 사상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광수에게도 권해 사회주의자가 되게 하려고 많이 힘썼다고 한다.
이성태가 언론인으로서 진면목을 드러낸 것은 조선으로 되돌아온 이후 일하게 된 사회주의 매체에서였다. 그는 주간지 <신생활>에 입사했다. 김명식, 유진희, 신일용, 정백 등과 함께 기자단의 일원으로 선발됐다. 쟁쟁한 사회주의 논객들이었다. 이성태가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신생활사 창립 주역인 김명식의 주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동향 출신이었다. 제주도 조천리가 그들의 고향이었다. 하지만 이 잡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회주의 색채가 선명했기 때문에 머지않아 총독부로부터 발행금지 처분을 받았고, 김명식 등 간부들은 투옥됐다.
<신생활>이 폐간된 뒤에도 이성태의 필력은 계속 발휘됐다. <동아일보> <개벽> 등 기성 언론을 무대로 문제적 기사를 연이어 기고했다.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과 ‘왼편을 밟고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전자는 1923년 조선 천지를 들썩이게 했던 물산장려운동을 사회주의자 관점에서 비판한 글이고, 후자는 실력양성운동과 문화운동을 표방한 이광수의 타협적 민족운동을 통렬히 공격하는 글이었다. 이성태는 신흥 사회주의 사조를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23년 첫 사회주의 비밀결사 가입
그는 1923년에는 마르크스주의 서적의 간행과 대중화를 위해서 ‘민중사’라는 출판사를 차렸다. 1924년에는 기성 잡지 <조선지광>을 인수해 사회주의 매체로 성격을 전환하는 일에도 가담했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요시찰인 사찰 기록에 따르면, 이성태는 사회주의 선전의 ‘독필을 날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성태는 혁명가였다. 가혹한 탄압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가담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자필 이력서에 의하면 비밀결사에 처음 가담한 때는 1923년이었다. ‘서울청년회의 내면 단체’에 가입했다고 한다. 고려공산동맹이라는 명칭의 비공개 사회주의 조직이었다. 서울청년회를 합법 공개활동의 거점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서울파’라고 곧잘 지칭되던 비밀 혁명단체였다.
1926년에는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을 위해서 서울청년회 내면 단체를 벗어나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역시 비밀결사였다. 이성태는 당의 중앙간부로까지 진출했다. 1927~1928년 기간에 집행부의 기관지 편집원, 조직부원 등으로 선임됐다. 당내에서도 이론과 선전 분야의 업무를 분장했음이 눈길을 끈다. 그의 재능이 문필 분야에 있음을 당내 동료들도 인정했기 때문이리라.
지하운동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는 결국 1928년 5월20일께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식민지 통치체제를 전복하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성태는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옥중에서 중병을 얻었다. 1929년 7월 하순 일간신문 지면에는 ‘이성태 병세 위중’ ‘공산당사건 피고 이성태 위독’ 등의 기사가 거듭 실렸다. 맹장염이 발발했는데 며칠간이나 방치한 탓에 병세가 극도로 악화했다. 형 집행정지로 일시 석방된 이성태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병원으로 이송됐다. 개복 수술이 긴급했다. “다시 회생할 것 같지 않습니다.” 병실로 면회를 다녀온 그의 형이 우울한 어조로 소감을 말했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는 2년 동안 여섯 차례나 수술받아야 했고, 반복된 고통을 이겨냈다. 행운은 거듭됐다. 1931년 6월에는 국외로 탈출할 수 있었다. 소련 블라디보스토크항으로 밀항하는 데 성공했다.
소련 국가폭력에 희생된 모스크바 조선인들
소련에 망명한 세월이 짧지 않다. 1931년 6월부터 1937년 9월까지 6년3개월 동안 이성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다. 틀림없이 모스크바 조선인들 사이에 알력이 있었던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그 알력은 적대적인 성질을 띠었고, 양상도 격렬했다. 이성태가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음해하는 투서를 작성한 원인은 그에 연관됐을 것으로 보인다. 음해를 받은 김단야는 소련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됐다. 투서가 작성된 지 두 달 남짓 뒤에 김단야는 내무인민위원부 요원들에게 체포됐고, 그로부터 다시 두 달쯤 지난 뒤에 사형당했다.
이성태도 무사하지 않았다. 투서를 작성한 지 한 달 뒤인 1937년 10월29일 그도 일본 첩보기관과 관계를 맺고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판에 박은 혐의로 체포됐다. 그해 12월9일 총살형이 집행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참고문헌
1. Бывш.член КП Кореи Ким-Чун-Сен /Лп-Сен-Тай/ (전 조선공산당원 김춘성 곧 이성태), Заявление: В Секретную Часть ИККИ (의견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 앞), 1937.9.28., 1-4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9-12
2. 김남섭, ‘스딸린 대테러의 성격: 1937-38년의 대규모 작전을 중심으로’, <러시아연구> 15-2, 2005, 49쪽
3. 안창호일기 1921년 2월4일, <안도산전서(중)>, 범양사출판부, 1990, 395쪽
4. ‘단우명단’, <興士團五十年史>, 대성문화사, 1964, 343쪽
5. 이광수, ‘나의 고백’, 1948, <이광수전집 13>, 삼중당, 1963, 249쪽
6. ‘李星泰’, 1925년께, <왜정시대인물사료> 1권, 81~82쪽, 국편 한국사DB, https://db.history.go.kr
7. 김춘성, ‘리력서’, 1932.9.28., 13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08 л.13-14об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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