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여가부… 장관 5개월 공석, 새 정책 브리핑은 1년전이 마지막
전체 직원 291명, 예산 1조7234억
여성가족부 홈페이지의 ‘브리핑’ 게시판은 작년 7월 25일 ‘잼버리 준비 상황 브리핑’을 마지막으로 1년째 멈춰있다. 장관이 직접 발표한 정책들을 홍보하는 곳으로, 그전까지 ‘다문화가족정책 기본계획’ ‘한부모가족정책 기본계획’ ‘아이돌봄서비스 고도화방안’ 등 굵직한 정책이 매달 한두 차례씩 올라왔다.
실제로 여가부는 1년째 제대로 된 정책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양육비 선지급제 방안’, 6월 ‘저출생 종합대책’ 등에 다른 부처들과 함께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데이트 성폭력이나 디지털 성범죄 같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여가부 목소리는 실종됐다. 관가에선 “여가부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는 말이 나온다.
여가부가 이 지경이 된 건 장관이 무려 156일째 공석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가부 폐지를 추진했지만 야당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이후 지난 2월 김현숙 장관이 잼버리 대회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지만 후임 장관은 임명하지 않았다. 6개월 가까이 신영숙 차관이 장관 직무 대행을 맡고 있다. 작년 김행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이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가 사퇴한 후엔 후임 장관의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방치된 중에도 여가부가 주무르는 예산은 올해 1조7234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보다 5000억원이나 늘었다. 가족 정책의 서비스 대상을 대폭 확대했기 때문이다. 맞벌이 가정을 위해 12세 미만 아이를 돌봐주는 아이 돌보미 서비스 예산이 1년 만에 1132억원 늘었고, 한부모 가족 예산도 397억원 늘었다.
여가부 직원도 2020년 270명에서 올해 291명으로 오히려 늘었다. 지난해 스토킹방지법과 인신매매방지법이 시행되면서 업무가 늘어 인력이 보강됐다.
반면 여성 정책 비중은 떨어졌다. 올해 여가부 예산은 전년 대비 9.9%(1556억) 늘었는데, 여성 정책 예산은 오히려 0.8%(21억원) 줄었다. 전체 예산 중 여성 정책 예산 비율도 2021년 16.7%에서 올해 14.2%로 떨어졌다. 이렇다 할 성평등 정책 발표도 없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한 언론 인터뷰에서 여가부 폐지 공약과 관련해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고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가부가 성범죄 등 사회적 현안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지난 5월 초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의대생이 여자친구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젊은 여성들 사이에선 “데이트 폭력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여가부는 두 달 가까이 지난 6월 말에 피해자 상담, 소송 지원 등 대책을 발표했지만 여성계는 “기존 정책을 ‘재탕’ ‘삼탕’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전 남자친구로부터 불법 촬영과 영상 유포 협박을 당한 유튜버 ‘쯔양’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여가부에 “재발 방지 대책을 내달라”는 민원이 접수됐다. 하지만 여가부는 아무 대응 하지 않고 지나갔다. 차인순 국회의정연수원 겸임교수는 “교제 폭력 예방 대책을 만들려면 법무부나 경찰과 협력해야 하는데, 부처 존폐가 불확실하고 장관도 없는데 어느 부처가 협업을 하겠느냐”고 말했다.
본래 여가부 직원들이 고위직으로 가려면 한번은 거쳐야 하는 핵심 부서로 여겨졌던 여성정책국은 인기가 시들어졌다고 한다. 한 여가부 전직 장관은 “이전엔 학력 좋은 행시 출신 엘리트 공무원들이 성평등 정책을 만들어보겠다며 여성정책국으로 몰려들었지만, 최근엔 있던 공무원들도 해외 연수를 가거나 다른 부서나 기관으로 옮기려는 분위기”라며 “특히 몇 년 사이 여성 관련 정책이 존재감이 없어지면서 무력감을 느낀 직원이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지난달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여가부 장관 임명 실패, 퇴행적인 여성 정책이 크게 우려된다”며 “여가부 장관을 지체 없이 임명하고 어떠한 조직 개편에도 그 기능을 유지하라”고 권고했다. CEDAW 회의는 여가부 장관이 4년마다 참석해 선진국과 성평등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행사로, 장관이 참석하지 않은 건 올해가 처음이다. 신영숙 차관은 국회 일정이 있어 김기남 기획조정실장이 참석했다.
2년 넘게 ‘폐지 유예’ 상태가 지속되며 여가부 직원들 사기는 크게 떨어진 상태다. 여가부는 과거에도 다른 부처와 통폐합 논란을 여러 차례 겪었지만, 지금처럼 방치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월 여성이나 가족 정책과 관련 없는 인사혁신처 출신 신 차관이 임명되고, 1급 기조실장 역시 보건복지부 출신이 오면서 “여가부 출신은 배제하고 타부처 직원들에게 ‘폐지 작업’을 맡긴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이제는 “이런 상태로 있느니 차라리 부처 폐지가 확정되어서 다른 부처로 옮기면 좋겠다”는 직원도 많다고 한다. 재작년 여가부 업무를 복지부 등으로 옮기는 개편이 추진됐을 때, ‘권익증진국’ 인기가 높았던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권익국은 원래 성범죄 피해자 지원 등 어려운 업무를 담당해서 가장 기피하는 부서였다. 그러나 정부 조직이 개편되면 권익국이 세종시가 아니라 서울과 비교적 가까운 법무부(과천)로 이관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인기가 생긴 것이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부처를 폐지하는 절차가 법으로 다 정해져 있는데, 정부는 아무런 정식 절차 없이 장관 자리를 비워놓는 방식으로 부처를 무력화하고 고사시키려 하고 있다”며 “민주 정부에서 보기 어려운 꼼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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