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 48m 무대·1200석 객석이 좁다… 속도감 넘치는 블록버스터

이태훈 기자 2024. 7. 25.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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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회 전석 매진된 연극 ‘맥베스’
/샘컴퍼니

“걱정하지 마. 물로 씻으면 지워질 거야. 얼마나 쉬워?”

‘덩컨 왕’(송영창)을 살해한 ‘맥베스’(황정민)가 검붉은 피로 뒤범벅된 채 두 팔로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매달릴 때, ‘레이디 맥베스’(김소진)는 말한다. 남편은 죄책감과 괴로움에 온몸을 뒤트는데 아내는 얼음처럼 차갑고 무표정하다.

셰익스피어 비극 '맥베스'가 한 달 넘는 공연 기간 1200석 대극장을 전회, 전석 매진시켰다. '맥베스'역의 황정민(오른쪽)과 아내 '맥베스 레이디'역의 김소진. /샘컴퍼니

남편 맥베스는 ‘당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에 사로잡혀, 승전 축하 잔치를 열러 자신의 성에 온 왕을 방금 살해했다. 폭 48m, 무대 뒤편까지의 깊이 27.8m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백스테이지까지 모두 열어 만든 광활한 무대는 전체가 노출 콘크리트 질감의 거대한 건물 내부다. 맥베스의 왕 시해 현장, 다가온 죽음에 압도돼 공포에 질린 왕의 얼굴은 양쪽 벽 위에 비춘 거대한 클로즈업 영상으로 관객들에게 생중계됐다. 대극장 객석과 무대의 먼 거리라는 연극의 한계를 단숨에 허물어 버린 압도적 비주얼이다.

연극에도 블록버스터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다면, 서울 남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인 ‘맥베스’는 피와 속도, 광기로 불타오르는 셰익스피어 블록버스터다.

그래픽=백형선

올 여름 극장에 풍성한 셰익스피어 비극의 마지막 주자이기도 하다. 지난 달엔 농인 배우와 소리꾼들이 출연하는 잔혹극 ‘맥베스’(국립극장)가 공연됐고, 우리 연극의 대표 배우들이 총출동한 ‘햄릿’(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과 국립극단의 여성 주인공 버전 ‘햄릿’(명동예술극장) 공연은 현재 진행 중이다.<그래픽>

‘맥베스’가 공연 중인 해오름극장 객석은 약 1200석. 이달 13일부터 다음 달 18일까지 38회 공연, 총 4만5600장의 티켓은 지난달 중순 예매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남김 없이 매진됐다. 티켓 예매 사이트에는 ‘불법 거래 피해에 주의하라’는 경고 공지가 오래 전부터 떠 있다. 뮤지컬도 아닌 연극이 해오름극장을 한 달 넘게 전회 전석 매진시키는 건 귀한 일이다.

◇황정민·김소진, 연기의 스펙터클

'맥베스 레이디' 김소진(왼쪽)과 '맥베스' 황정민. /샘컴퍼니

무엇보다 이 연극의 가장 압도적인 스펙터클은 맥베스 황정민과 레이디 맥베스 김소진의 연기 그 자체다. 둘은 자주 무대 끝에 서거나 아예 걸터앉으며 관객에게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다가와 연기한다. 파르르 떨리는 얼굴 표정, 정맥이 푸릇푸릇 비치는 팔뚝, 무고한 자들의 피로 얼룩진 손, 더럽고 아름다운 욕망과 거짓이 꿈틀꿈틀 흘러넘치는 몸이 관객의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황정민의 연기는 명불허전. 인간적 고뇌로 갈팡질팡하던 맥베스는 왕을 살해한 뒤부터 마법약에 취한 듯한 광기로 무고한 죽음 뒤에 더 참혹한 죽음들을 이어붙여 나간다. 레이디 맥베스 역의 김소진은 더 놀랍다. 푸른 불꽃을 내뿜는 엔진처럼 왕위와 권력을 향한 남편 맥베스의 살육극을 추동하는 것도, 냉혹한 판단과 결단력으로 이 핏빛 비극을 파국의 끝까지 몰아붙이는 것도 김소진의 레이디 맥베스다.

영화 ‘더 킹’의 사투리 쓰는 여검사로 깊은 인상을 남긴 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역을 맡아온 김소진은 송강호, 이성민 등 명배우들을 낳은 극단 차이무 출신. 특유의 또렷한 발성과 호흡으로 레이디 맥베스의 캐릭터에 자신만의 색감을 또렷이 입힌다. 두 배우는 키스 장면에서조차 입을 맞추는 게 아니라 서로의 피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연을 앞두고 한창 연습 중이던 이달 초 만난 김소진 배우는 “맥베스는 결국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욕망을 향해, 꿈꾸던 왕좌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 이면에선 줄곧 자신 안의 두려움과 싸우고 있어요. 거기에 끌려가다 결국 그 두려움 안에 갇혀 결국 비극적 결말로 향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영화적 장면 전환… 비주얼의 힘

/샘컴퍼니

여신동 무대감독이 만들어낸 무대는 기존 대극장 연극의 무대가 가진 클리셰를 모두 깨뜨리겠다는 듯 과감하다. 대관식 뒤 열린 만찬장의 테이블은 무대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원근감을 만들고, 왕의 자리엔 배신당한 충직한 친구 ‘뱅코우’(송일국)의 유령이 앉아 있다. 왕이 된 맥베스의 눈에만 보이는 친구의 유령은 참혹하게 살해당한 모습 그대로다.

대관식의 카펫도, 맥베스 왕과 왕비 레이디 맥베스가 쓴 왕관도, 왕좌 위로 흘러내린 불길한 액체도 모두 녹아내린 아스팔트처럼 깊은 검은색. 스무 명 넘는 배우가 등장하는 대극장 무대에 백 스테이지도 없지만, 장면 전환에 공포물처럼 깜빡이는 불빛과 굉음에 가까운 음향을 활용해 연극보다는 넷플릭스 영화처럼 느껴진다. 억울한 학살의 공간은 무대 위 격벽으로 영화 ‘올드보이’의 장도리 격투신처럼 긴 복도를 만들어 재현한다.

우리 연극을 대표하는 연출가 중 한 명인 양정웅 연출가는 이번이 아홉 번째 셰익스피어극. 그는 2004년에 이미 ‘맥베스’를 재해석한 연극 ‘환(幻)’으로 호평받은 적이 있다. 20년 만에 다시 만드는 맥베스는 “원작의 텍스트에 충실하되, 현대적 감각과 비주얼로 표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삶과 죽음처럼 양극단이 실은 둘이 아니라는 통찰은 셰익스피어 작품에 반복해 등장하는 테마예요. 그중에서도 ‘맥베스’는 극 도입부터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고 말하죠. 셰익스피어의 시대로부터 거의 400년이 지났지만, 인간 내면에 빛과 어둠이 한꺼번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거기서부터 가장 강렬하고 임팩트 있는 비극, 맥베스의 매력이 생겨납니다.”

공연은 다음 달 18일까지, 4만4000원~1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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