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계의 ‘민트초코’… 라이 위스키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김지호 기자 2024. 7. 25. 00: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위스키디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7

낮잠을 자고 있는 휘슬피그 증류소의 돼지. /WhistlePig

간식으로 호밀을 잔뜩 먹은 돼지 한 마리가 혼수상태에 빠져있습니다. 돼지의 이름은 모티머(Mortimer). 잠잘 때 코 고는 소리가 유난히 크고 휘파람 소리 같았던 모티머에게 농장주는 ‘휘슬피그(WhistlePig)’라는 별명을 지어줍니다. 농장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모티머는 이 구역의 ‘감독관’이자 마스코트입니다.

61만 평 규모의 호밀밭과 다양한 실험작물로 둘러싸여 있는 휘슬피그 증류소. /WhistlePig

휘슬피그는 2007년 미국 버몬트주에 설립된 라이 위스키 증류소입니다. 위스키 제작에 쓰이는 주원료가 보리가 아닌 호밀인 것이죠. 150년 넘는 낙농장을 증류소로 개조한 휘슬피그는 61만 평 규모의 호밀밭과 다양한 실험작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캐나다 앨버타와 인디애나 MGP(Midwest Grain Products)에서 증류한 라이 원액을 구매해, 여러 오크통에 숙성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스카치로 치면 ‘피니싱 기법’으로 하나의 오크통이 아닌 여러 오크통에서 추가 숙성을 통해 복합적인 맛을 위스키에 입히는 작업입니다. 고든 앤 맥페일 같은 독립병입업자들이 위스키를 판매해온 방식과도 유사한 셈이죠. 휘슬피그는 2015년부터 버몬트 지역에서 재배한 곡물로 직접 증류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옥수수로 만든 버번이 미국 위스키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18세기에는 라이 위스키가 미국을 대표하는 위스키였습니다. 당시 신대륙으로 이주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독일 이민자들이 정착하며 이를 전파했던 것이지요.

◇이민자들의 라이 위스키

미국 버몬트주 휘슬피그 증류소 인근 호밀밭. /WhistlePig

이민자들이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곳은 미국 동부 뉴욕, 펜실베이니아, 메릴랜드 지역이었습니다. 미국의 동부는 여름이 덥고 겨울은 몹시 춥습니다. 추위에 민감한 보리를 키우기에는 혹독한 환경이죠. 반면 호밀은 추위에 강하고 건조한 땅에서도 잘 자랍니다. 미 동부 지역에서 호밀 위스키가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유럽에서 호밀은 가난한 자들의 주식(主食)이었습니다. 이주민 대부분은 가난했지만, 호밀 다루는 법만큼은 익숙했습니다. 일찍이 증류 기술을 터득한 이민자들은 이곳에서 빵과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호밀을 재배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도 1797년 마운트 버넌에 라이 위스키 증류소를 지었으니, 그야말로 라이 전성시대였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 서부 개척 시대와 함께 옥수수가 미국의 주요 작물로 자리 잡은 이후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라이 위스키는 급속도로 쇠퇴의 길을 걸었고 금주법 이후 결국 버번에 ‘왕좌의 자리’를 넘겨줘야 했습니다. 다소 거칠고 톡 쏘는 느낌의 라이 위스키보다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버번이 미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것이죠.

금주법 기간에 위스키 업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목숨 걸고 밀주를 만들던지, 의료용 위스키 제조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일은 그만두는 것도 선택사항에 있었겠지만 한평생 해오던 일을 접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차선책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캐나다로 넘어가 위스키 생산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캐나다의 라이 위스키를 키운 것은 금주법 기간에 캐나다로 이주한 증류업자들의 역할이 8할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휘슬피그가 금주법 이전 ‘위스키의 원조’를 표방하며 캐나다로부터 라이 원액을 구매해 사용했던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라이 위스키의 정의

미국에서 라이 위스키라는 명칭을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규정들을 지켜야 합니다. 우선 호밀 함량이 51%를 넘어야 하고 반드시 내부를 불로 태운 새 오크통을 사용해야 합니다. 증류액은 알코올 도수 80도 이하. 오크통에서 숙성할 원액은 62.5도를 넘지 않아야 하며 최종 병입 도수는 40도를 넘겨야 합니다. 최소 숙성 기간은 2년으로 그 어떤 색소나 첨가물을 넣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미국 내에서 이루어져야 비로소 라이 위스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옥수수 대신 호밀을 사용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버번과 동일한 조건입니다. 휘슬피그는 캐나다산 원액을 사용했기 때문에 병의 원산지 표시란에 미국이 아닌 캐나다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세계 증류주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휘슬피그 10년. /WhistlePig

국내에서 접근성과 가성비를 다 잡은 제품은 휘슬피그 10년입니다. 출시 직후 여러 국제 대회에서 인정받은 휘슬피그 10년은 샌프란시스코 세계 증류주 대회(San Francisco World Spirits Competition)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며 맛을 증명했습니다. 호밀 함량 97%에 알코올 도수 50도. 코를 잔에 대면 시골 건초 냄새와 홍차 계열의 향이 기분 좋게 다가옵니다. 화사한 과일 향과 스피어민트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위스키를 한 모금 물면, 향에서 느껴졌던 달콤함은 옅어지고 구수한 호밀빵과 설익은 바나나 같은 맛이 느껴집니다. 알코올 도수에 비해 부드러운 타격감과 입안에 쫀득쫀득하게 붙는듯한 감칠맛이 재밌습니다. 거친 라이 특유의 풀 냄새나 검정 후추 느낌은 약한 편입니다.

휘슬피그 마스터 디스틸러 미치 마하(왼쪽)와 마스터 블렌더 메건 아일랜드. /WhistlePig

순도 높은 라이를 고집하며 다양한 실험을 하는 휘슬피그 증류소. 이들은 비 증류 생산자(None-Distiller Producer)로 시작해 이제는 자체적으로 곡물을 재배하고 증류하는 과정까지 확장해나가고 있습니다. 메이커스 마크를 이끌었던 초창기 휘슬피그의 마스터 디스틸러인 데이브 피커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수해도 괜찮다. 우리 업계에서 실수는 스스로 마셔버리면 그만이다.” 맛없게 타진 ‘소맥’을 스스로 해결하는 필자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스카치나 버번에서 싫증을 느꼈다면 금주법 이전에 미국을 대표했던 위스키 맛을 경험해보시는 것은 어떨지. 위스키계의 ‘민트초코’, 라이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위스키디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7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