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정답을 비켜가는 저출생 대책
“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옛날에 다 정리된 얘기들이 다시 나오는데… 1990년대로 돌아가는 느낌이랄까요.”
한 유아교육·보육 전문가의 말이다. 지난달 19일 정부의 ‘인구 국가비상사태’ 선언 이후 한 달간 나온 저출생 관련 정책들을 보며 든 내 심정 역시 그랬다.
필리핀 가사관리사 서비스가 서울시에서 시범운영된다. 서울시는 다음달 6일까지 필리핀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서비스 이용 신청을 받아, 9월부터 6개월간 전일제(8시간), 시간제(4시간·6시간)로 서비스를 시행한다. 만 24~38세의 필리핀 국적 외국인 노동자들이 비전문취업비자(E-9)를 통해 들어오는데 100명 규모 시범사업으로 시작해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시간당 1만3700원으로 하루 8시간 기준 월 238만원가량이 든다. 고용노동부는 내년 상반기 중 전국에 1200명까지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외국인 유학생에게도 가사돌봄 활동을 허용할 방침이다.
지난달 27일엔 교육부가 어린이집·유치원 통합 첫발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유보통합 실행계획’을 발표했다. 희망하는 0~5세 모든 영유아에게 12시간 돌봄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을 가장 앞세워 강조했다. 하반기 100개 모델학교를 시작으로 2027년까지 3100곳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보도자료엔 ‘세계 최고 영유아 교육·보육을 위한 유보통합 실행계획(안)’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관련 기사들엔 “애를 12시간 맡길 거면 왜 낳으라고 하는 거예요?” “아이들이 불쌍하다” “어른이 일찍 끝나는 게 우선이지 거꾸로 가는구먼” 등 비난 댓글이 폭주했다.
시행을 앞두고 있는 필리핀 가사관리사와 유보통합은 현 정부의 주요 저출생·보육 정책들이다. 주요국의 대책들과 정확히 반대 방향이다.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줄이는 주요국들과는 반대로 아이를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오래, 잘 돌봐주겠다는 대책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행복을 느끼도록 해도 낳을까 말까인데, 아이가 짐이라는 듯 돌봄 서비스만 강조하면 대체 아이는 왜 낳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육아천국으로 꼽히는 스웨덴에 머물며 <라테파파의 나라에서 띄우는 편지>라는 시리즈 기사를 보도한 것이 6년 전이다. 카페와 공원, 도서관, 거리, 버스·전철 할 것 없이 수없이 마주치는 라테파파(적극적으로 육아를 하는 북유럽의 아빠를 부르는 말)들이 신기해서 취재를 자원했다. 기사 제목들은 ‘여기선 오후 4시면 차가 밀린다… 모두 애 데리러 가니까’ ‘남자들도 자녀와 친해질 시간, 좋은 아빠가 될 기회 있어야’ ‘아이가 집에 올 때 부모도 퇴근하는 것은 상식이다’ ‘법은 있지만 실제로 사용 못하는 문화 바꿔야’ 등이었다.
정답은 모두 나와 있다. 전 세계의 전문가와 출산율 반등에 성공한 주요국들이 마르고 닳도록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과 성별 격차 해소, 일·가정 양립 지원 정책 등이다. 90년 전인 1934년 일찍이 <인구 위기>라는 책을 쓰며 스웨덴의 가족과 인구정책, 나아가 복지정책의 초석을 놓은 알바 뮈르달과 군나르 뮈르달 부부가 강조한 인구정책 관련 조언은 현재까지 유효하다. 출생률 제고 정책이 성공하려면 우선 기혼 여성이 경력을 쌓는 동시에 자녀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자녀 양육에 드는 경제적 부담 상당 부분을 개별 가족이 아닌 사회가 져야 한다는 것, 모든 인구 관련 정책들은 차별 없이 모든 가정에 보편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만 정답 사이를 비켜가고 있다. 아이를 낳고 싶은 남녀 모두에게 아이를 키울 시간과 이를 위한 일정 부분의 경제적 여유를 보장하는 것이 핵심인데, 정부는 구조적인 변화는 시도하지 않고, 중산층 이상의 일부만을 대상으로 하는 대책으로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 지난 23일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한국여성연구소, 한국여성학회가 공동주최한 ‘정부의 저출생 대응 담론과 정책 진단’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성평등 관점이 빠진 정부의 일·가정 양립 정책은 여성을 중심으로 일과 가정을 동시에 챙기도록 유도하며, 오히려 모성 페널티(엄마들이 일터에서 맞닥뜨리는 불이익)를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영세기업과 자영업자, 급증하는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 등 육아휴직 사각지대는 이번 정부 대책에서도 빠졌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평범한 행복조차 사치가 되어버렸나. 정부는 뭘 하고 있는가. 저출생 정책들을 대하며 더욱 마음이 무겁다.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 song@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대통령실 “김 여사, 다음 순방 동행 않기로”…이후 동행 여부는 그때 가서 결정
- 명태균 “청와대 가면 뒈진다고 했다”…김건희에게 대통령실 이전 조언 정황
- 김예지, 활동 중단 원인은 쏟아진 ‘악플’ 때문이었다
- 유승민 “역시 ‘상남자’···사과·쇄신 기대했는데 ‘자기 여자’ 비호 바빴다”
- [제주 어선침몰]생존자 “그물 들어올리다 배가 순식간에 넘어갔다”
- [트럼프 2기] 한국의 ‘4B’ 운동이 뭐기에···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서 관심 급증
- ‘프로포폴 불법 투여’ 강남 병원장 검찰 송치···아내도 ‘중독 사망’
- 서울대 외벽 탄 ‘장발장’···그는 12년간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 주말 서울 도심 대규모 집회…“교통정보 미리 확인하세요”
- 조훈현·이창호도 나섰지만···‘세계 유일’ 바둑학과 폐지 수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