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그린스마트도시 원형, 중세 개경의 정원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2024. 7. 2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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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정치’를 펼쳤던 고려 왕조의 흥망 보며
부산 그린스마트 도시, 장기비전 가늠하게 돼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2024년 부산시청 홈페이지에 탑재된 시정안의 메인은 대한민국 중추 글로벌 허브도시(공항·철도·항만 트라이포트 구축), 그린생태스마트도시이다. 그린스마트도시는 그린과 스마트가 결합된 조어이다. ‘그린’에 방점을 두었기에 그린스마트로 표제어가 달린 듯하다. 그만큼 초록 식물 나무 녹지공간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게다.

그린의 물상은 식물에서 비롯한다. 식물 자원이 생장하는 녹지 공간은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고 바람길을 뚫어 체감기후를 높이거나 낮추는 보온 보냉 효과도 있다. 이른바 녹색도시 조성과 식물자원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법령으로도 관리돼 왔다. 녹색도시로 비견할 것이 중세의 정원이다.

중세 도시 개경에는 시내를 관통하는 큰 하천이 없었다. 풍수상 장풍국에 해당하는 폐쇄형 분지 지형이라, 사는 사람은 더위·추위를 매우 민감하게 느꼈다. 기후 체감도를 낮추려 인위적으로 물길이 시작되는 산림원에다 도랑을 파서 물을 끌어오거나 인공폭포를 두었다. 사실 개경 내 정원은 도시 환경을 푸르게 하는 녹지 제공의 순기능에 앞서, 국왕과 왕실 가족의 공적 권위를 드러내는 장소였다.

정은 너른마당으로 궁정의례가 거행되는 곳이다. 원림은 휴게처로서 물·숲·동식물 사육시설·정자 건물을 갖춘다. 원림에 물의 출입처가 될 산이 없는 경우 인공산을 만들기도 했다. 궐내 정원은 왕의 침전구역 가까이 위치하는 만큼 그 관리는 국왕이 신임하는 내시직이 담당했다. 왕과 왕실 가족의 공간이므로 문과 담으로써 출입을 통제했다. 원래 숲과 잇닿던 정원은 금지구역으로 보호된 셈이다. 때문에 국왕의 정원(어원) 관리는 품계는 높지 않아도 왕이 신임하는 자가 담당했다.

왕의 정원에는 대외교역에서 물 건너온 진귀한 동식물이 산다. 국가 제사에 올리는 과일과 동물도 기른다. 배신을 상징하는 배꽃이 두 번 피거나, 까마귀 떼·올빼미·여우가 어원에 나타나면 재앙이 뒤따른다. 대내외적으로 국가·왕의 권위에 직결되기에 역대 국왕은 정원 관리에 정성을 쏟았다. 다만 무인 집권기 이후 국왕은 정원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대몽 항전을 치르는 동안 개경이 황폐해진 데다, 원 간섭기 아래 고려 왕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기 쉽지 않았다.

미온적이나마 반원개혁을 시도한 공민왕대에 와서야, 화원을 조성하고 2층 팔각전 주위에 화초를 심어 연회를 개최했다. 공민왕이 중요하게 여긴 곳은 연복정이다. 이곳을 거점으로 자신의 측근 세력 결집의 발판으로 삼았다. 잦은 정치 갈등으로 공민왕은 시해됐다. 겨우 10살에 왕위에 오른 우왕은 온전한 정치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장성한 20살 남짓의 우왕은 후원·호곶·평주일대 매사냥을 자주 하여, 호협군주로 악명 높았다. 이제현과 후대 고려사 찬자는 우왕이 고려를 멸망으로 이끈 장본인이라 했다. 왕 씨가 아닌 신돈의 아들로 폄하되던 우왕이다. 어쩌면 말타기·활쏘기는 호협으로 치장된 군사 활동, 음행과 잦은 결혼은 측근 세력 확보를 겨냥했을 수도 있다.

뒤이어 공양왕은 새로이 적경원과 해온정을 건립했다. 적경원은 4대조를 봉하여 높이고 신주를 모시는 제사시설이다. 태조 이성계는 적경원을 고려 왕 씨 일족의 것이라 지목하고 훼철한다. 시설의 조성과 파괴에도 정치적 전략이 숨은 셈이다.

중세 고려말 동아시아 세계의 위기는 가속됐다. 홍건적·왜구 전쟁에다 몽골제국의 팽창에 딸려 온 동물 유래의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했다. 중세 때 사람은 곧 국가 자산이다. 전쟁 후 재건에 요구되는 인적·물적 재원이 쪼들려, 궁궐이나 각종 시스템이 제때 작동하지 못했다. 후기 국왕은 파괴된 궁궐 대신에 정원(어원)을 도구 삼아 왕권을 현시하는 도구로 쓴 것 같다.

중세 고려의 녹지공간인 정원은 애초 왕권을 드러내는 가시적 장소였다. 정원에서 사냥하거나 잔치를 즐긴 왕의 행위는 후대에 비난을 받았다. 민생을 외면했기에 당연한 귀결이다. 일면 인적 물적 재원이 허락하는 한도 내, 가용 시설을 활용한 ‘조치’의 방향성은 가히 새길만하다.

최근 부산 곳곳에서 시정과 시민 여론이 충돌하고 있다. 구덕운동장 재개발·용호만 이기대·요트경기장 개발 안으로 연일 떠들썩하다. 도시재생지구 차원에서 100여 년 근대 스포츠의 탄생지이자 항일의 산실이던 구덕운동장과 부산의 앞 바닷길에 아파트가 들어선다.


구덕운동장은 불과 2년 전 잔디와 의자를 교체하는 데 적잖은 비용이 들었다. 중장기적 계획하에 도시설계나 재개발 플랜이 있던 걸까. 이즈음 시민을 위한 녹색(그린)권 보장이 먼저인지, 보여주기식 행정 속도 내기나 개발이 우선인지. 모순된 도시플랜의 역설에 답해주었으면 한다. 해양도시, 글로벌 그린스마트 도시라는 부산의 정체성에 맞게끔 바다와 녹지를 살리는 도시설계가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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