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소통과 화합
요즈음 농담으로 건배사 잘 하는 사람을 ‘건달(건배사의 달인)’이라고 하고, 인기 있는 건배사 중의 하나로 ‘소화제’라는 것이 있다. 의미는 ‘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라는 뜻이다.사람도 인체 내 장이나 관이 소통과 화합이 되지 않고 막히면 필연적으로 염증이 오게 되고, 큰 질병으로 이어져 사망에 이르기까지 한다.
20여 년 전의 일이다. 식사 자리에서 지인의 소개로 50대 중반의 L씨를 만났다. 비쩍 말라서 살이 없는 그분은 그날 깨작거리듯 식사를 했다. 음식이 맛있지만, 신나게 먹고 나면 뒷일이 걱정이어서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거다. L씨는 젊은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복부를 크게 다쳤다. 병원에서는 장이 터져서 복막염이 되었다며 즉시 수술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했단다. 수술을 받고 가까스로 회복했지만 장 유착으로 식사를 하면 잘 내려가지 않고 결국 토하게 되는 증상으로 이어지면서 병원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시골에서 부산으로 와 회사를 여러 개 경영하고 있는 ‘회장님’이 된 L씨에게 맛있는 음식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식욕은 당기지만, 배만 불러오고 토해야 하는 뒤끝 탓에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딱한 처지였다.
장폐색은 말 그대로 장이 막히는 현상으로 외과 의사가 흔히 접하는 질환 중의 하나다. L씨처럼 복부 수술 후 유착에 의해서 생기는 장폐색이 가장 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유착 환자는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채 살아간다. 반면 유착의 정도가 심해지면 장이 부분적으로 막혀 뱃속에 가스가 차고 식사 후 복통이 있을 수 있으며, L씨처럼 토하기까지 하지만 수술 없이 거의 다 회복될 수 있다.
보존적 치료로도 안되면 수술로 유착 부위를 풀어주어야 하는데, 재 유착이 잦아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외과 의사도 합병증과 높은 재수술에 대한 부담 때문에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어 한다. 나는 L씨에게 수술 방법과 결과까지 세세히 설명하고는 “이래도 수술을 받아 보겠느냐”고 했더니, L씨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L씨는 적응 기간이 끝나자마자 “식사가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고 기뻐했다. 요즈음 ‘3D과’로 전락해버린 외과 의사로 평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이런 보람을 젊은 후배들과 공유하고 싶기도 하다.
지금 대한민국 의료계는 의정 갈등으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다. 별다른 소통 없이 갑작스럽게 내놓은 정부의 ‘의대 증원 2000명’이 발단이었다. 전국의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했고, 의대생들이 휴학을 하면서 정부의 방침에 강력히 맞서는 등 물러설 수 없는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우리사회가 L씨의 장폐색처럼 꽉 막혀버린 거다.
의대교수들도 해법을 위해 들 메스를 찾지 못하고 있다. 빌미를 제공한 정부 또한 ‘폐색을 제공한 것은 의료계’라며 그들 손에 소통의 메스를 맡길 생각이 없는 듯해 보인다. 중간에 끼인 환자와 국민만 아우성을 치고 있는 형국이다.
필자가 부산대 병원장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대학 은사님이 원장실에 축하하러 오셔서 “개혁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하시기에 “제도나 기구 등을 새롭게 고치거나 만드는 것 아닙니까?” 라고 교과서적인 답변을 드렸다. 이에 스승님은 이런 명답을 내놓으셨다. “그것도 맞다. 하지만 원래의 뜻은 옷감이 없던 원시시대엔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는데 이것으로 만든 옷은 입다보면 비를 맞거나 세월이 지나면서 옷이 딱딱하게 되어 입을 수 없게 됐다. 원시인들은 이 옷을 다시 다듬이질을 해서 입기 좋도록 가죽을 유연하게 만들었는데, 이걸 개혁(改革)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개혁도 다듬이질을 너무 세게 하면 옷감에 구멍이 나서 옷이 상하고, 약하게 두드리면 옷이 부드러워지지 않아 문제다.”
리더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려면 여러 사람의 지혜를 낮은 자세로 잘 받아 들여서 조직을 이끌어나가야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은사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분은 작고하셨지만, 필자는 평생 이 말씀을 금과옥조로 되새기고 있다. 인체의 수술이나 제도의 개혁 모두 소통과 화합을 통해 많은 전문가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고 현명하게 판단해야만 훌륭한 지도자로 존중받을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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