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장악 폭주에 맞서는 ‘연대 취재’ 실험 [저널리즘책무실]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바이라인(by-line)은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을 적는 줄’이라는 뜻이다. 통상 기사의 맨 끝에 바이라인이 따라붙는다. 영문 기사의 맨 끝에 ‘Reported by ○○○’(○○○이 쓴 기사라는 뜻)이라는 말을 썼던 데서 비롯했다. 한명 또는 복수의 기자 이름이 나오는 게 일반적이지만, 때로는 ‘특별취재팀’과 같은 표기가 쓰이기도 한다. 개별 언론사 차원에서 각 부서의 기자들을 차출해 특정 현안을 집중적으로 다룰 때 이런 바이라인이 달리곤 한다.
최근 한겨레 일부 기사에 좀 특이한 바이라인이 등장했다. ‘언론장악 공동취재단’. 바이라인에 5개 언론사 로고와 함께 각 매체 소속 기자들의 이름이 실렸다. 공동취재단에 참여한 언론사는 뉴스타파, 미디어오늘, 시사인, 오마이뉴스, 한겨레다. 공동취재 프로젝트 이름은 ‘언론장악 카르텔 추적’이다. 윤석열 정부의 언론장악 실태,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인물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 등을 낱낱이 파헤쳐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취지다. 5개 언론사 소속 기자들이 공동으로 취재를 한 뒤, 기사는 ‘언론장악 공동취재단’, ‘언론장악 카르텔 공동취재팀’ 등의 바이라인을 달고 각 언론사 스타일에 맞게 작성하는 방식이다.
이런 취재 형태를 언론계에선 ‘협업 저널리즘’(collaborative journalism)이라고 부른다. 협업 저널리즘은 “둘 이상의 언론사가 자신들이 가진 인적·물적 자원을 보완하고, 생산된 뉴스 콘텐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협력적 관계를 맺는 것”(한국언론진흥재단, ‘디지털 환경에서 협업 저널리즘 모델 연구’)을 말한다. 여러 언론사의 취재·보도 자원을 공동으로 활용하는 효과가 있어, 광범위한 취재가 필요한 대형 기획이나 권력 비리를 파헤치는 탐사 보도, 재난·재해 보도 등에 유용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언론사 간의 협업 사례가 매우 드물지만 외국에선 제법 역사가 길다. 최초의 대규모 협업 취재 사례로 꼽히는 것이 미국에서 이뤄진 ‘애리조나 프로젝트’다.
1976년 미국 서부 애리조나주 피닉스시에서 탐사보도 전문기자로 활동하던 돈 볼스가 차량 폭탄 테러로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볼스는 당시 지역의 유력 정치인과 마피아의 부패 커넥션을 취재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미국 각지의 탐사보도 기자들이 속속 애리조나로 모여들었다. 볼스가 끝내지 못한 취재를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지역 정관계와 갱단이 얽힌 부패 구조를 파헤친 연재기사를 23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이들의 보도는 경찰 수사로 이어졌고 많은 범죄자들이 처벌을 받았다.
협업 취재가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13년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 주도로 세계 40여개국 언론인 80여명이 공동으로 취재한 조세회피처 추적 프로젝트였다. 한국에선 뉴스타파가 참여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씨가 대표적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을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단체가 주도한 역외 탈세 공동취재 프로젝트는 ‘파나마 페이퍼스’(2016년), ‘파라다이스 페이퍼스’(2017년), ‘판도라 페이퍼스’(2021년)로 이어졌다.
‘파나마 페이퍼스’의 경우, 파나마의 한 로펌에서 유출된 방대한 규모(2.6테라바이트)의 역외 탈세 관련 자료를 입수한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이 이 단체에 국제 협업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영국 가디언, 프랑스 르몽드 등 76개국 109개 언론사 소속 기자와 프리랜서 기자 376명이 참여했다. 개별 언론사만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했을 대형 탐사보도를 국경을 초월한 수많은 기자들이 힘을 합쳐 해낸 것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이 보도로 여러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이 사퇴하거나 퇴진 압박을 받는 등 큰 파장이 일었다.
이 같은 굵직한 국제 협업 프로젝트에 수차례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뉴스타파는 국내에서도 협업 저널리즘의 산파 구실을 했다. 뉴스타파는 문화방송(MBC), 한국방송(KBS), 프레시안 등 여러 매체와 협업 취재를 진행했는데, 2018년 문화방송 탐사기획팀과 함께 한 ‘가짜 학문 제조공장의 비밀’ 프로젝트 때는 뉴스타파 기자가 문화방송 뉴스데스크에서 직접 리포트를 하고 스튜디오 출연까지 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부산문화방송, 경남도민일보 등 5개 매체와 함께 ‘검찰 예산 검증 공동취재단’을 꾸려 전국 검찰청의 특수활동비 오남용 실태를 파헤쳤다.
탐사보도의 요체는 권력 감시다. 비판 언론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는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 언론장악 폭주 실태를 폭로하고 그 부역자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권력 감시임에 틀림없다. 이번 공동취재가 권력 감시 보도의 새로운 지평을 연 협업 실험으로 기억되기를 기대한다.
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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