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 전 홍수 참사, 모든 것 쓸어가 버린 여름철 폭우

2024. 7. 2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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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비롯한 전 세계가 기상 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처절, 참절한 대홍수(大洪水)와 대해일(大海溢)을 거듭 겪은 황해도 봉산군 일대의 무산(無産) 농민은 지난 20일 뜻도 아니한 수해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참상을 이루었도다. 저들의 생명과 같은 유일의 농작물은 이해(泥海)로 화하여 적지(赤地)가 되고 먹고 입을 것이 없어 쓰린 가슴을 부여 않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며 갈 곳 없어 방황 주저(躊躇)하는 가련한 참상은 사람이 되어 차마 볼 수 없는 바, 이때에 우리 사리원 지국은 애연(哀然)히 전조선 인사의 뜨거운 동정을 구하노라. 1924년 7월, 동아일보 사리원지국 백(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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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이재민 참담한 모습 연일 신문 보도 죽은 사람 모양으로 누워 하늘 원망 음악회 열어 수입금 전액 기탁 선행 동정은 못 할 망정 물구경 꼴불견도

한반도를 비롯한 전 세계가 기상 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쪽에서는 극심한 가뭄과 더위, 한쪽에서는 엄청남 폭우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런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무어라 딱 꼬집어 한 가지를 꼽을 순 없겠지만 인간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100년 전 한반도 여름 날씨는 어떠했을까. 그때의 모습을 찾아 떠나보자.

1924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의 헤드라인을 보자. '공동묘지의 사태(沙汰)에 묵은 시체가 드러나고', '암흑한 시가(市街)에는 새로운 시체가 떠다니게 되어', '감우(甘雨)가 수재(水災)로 변해', '대구 시가에는 침수 1천여 호', '파주(坡州) 부근 피해 다대, 피난민 약 800명이나 되어', '군(郡) 당국, 경찰서에서 구조 중', '시중(市中)은 이해화(泥海化)', '지붕까지 침수된 것이 140호', '이재자(罹災者) 2000여 명, 한 번에 2섬씩 밥을 지어, 매명(每名) 하에 한 덩이씩 주어' 등이다.

다음날인 25일에도 각 신문 헤드라인은 '홍수'로 채워졌다. '대구(大邱) 홍수는 부윤(府尹)의 실책으로', '전 조선에 걸친 폭풍우', '한재(旱災)에 신음하던 삼남(三南)지방까지 홍수 피해', '30년 래의 초유의 대 침수', '개성(開城)에서 또 폭우', '침수 가옥 또 600여 호' 등이다.

제목만으로도 1924년 7월 하순 조선을 강타한 폭우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민들의 참담한 모습은 연일 신문에 보도가 되는데 그 중 한 두 가지만 소개해 본다.

"황해도 신천군 일대는 수해가 많지 아니 하나 노월면은 수해가 대단하고 가산면 용두리도 대단하며 (중략) 24일에는 식료가 절핍(絶乏)하여 하루 3홉의 좁쌀도 얻을 수 없었고 울며 불며 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략) 이번 수해로 인하여 절망되어 인심이 흉흉하며 다만 풀에 누워 죽은 사람 모양으로 하늘을 원망할 뿐이라. (하략)" (1924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

"경기도에서도 수재가 제일 심한 곳은 파주군 문산 지방인데 농작물의 태반을 버렸으며 인축의 사상도 많은 모양인데, 초리골이라는 동리 산 비탈에 식구 아홉 사람 있는 집과 네 사람 사는 집이 있었는데 지난 21일 밤에 그 집 위에서 지동(地動)치는 소리 같은 음향이 요란히 들였으므로 두 집 식구는 한꺼번에 대문을 차고 나오려 할 때에, 앞산에 사태(沙汰)가 나서 산이 한꺼번에 무너져 대문을 채 열자 마자 두 집 식구가 함몰을 하였으며, 아홉 식구 중에서 늙은 노파 하나가 겨우 피하였다는데 그 이튿날 동리 사람이 모여서 흙을 헤치고 파내보니 창자가 터지고 머리가 깨져 그 참혹한 형상은 차마 눈으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더라." (1924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

이런 참혹한 수해가 발생하자 구호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구제금 모집도 전국에서 시작됐다. 그 중에서 가장 가슴을 울리는 절절한 것이 1924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사리원 지국의 호소문이다. "처절, 참절한 대홍수(大洪水)와 대해일(大海溢)을 거듭 겪은 황해도 봉산군 일대의 무산(無産) 농민은 지난 20일 뜻도 아니한 수해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참상을 이루었도다. 저들의 생명과 같은 유일의 농작물은 이해(泥海)로 화하여 적지(赤地)가 되고 먹고 입을 것이 없어 쓰린 가슴을 부여 않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며 갈 곳 없어 방황 주저(躊躇)하는 가련한 참상은 사람이 되어 차마 볼 수 없는 바, 이때에 우리 사리원 지국은 애연(哀然)히 전조선 인사의 뜨거운 동정을 구하노라. 1924년 7월, 동아일보 사리원지국 백(白)."

신문을 통한 기부금 모집도 많았지만 음악회를 개최해 기부금을 모은 사례도 눈에 띈다. "대구노동공제회와 대구청년회와 대구여자청년회와 교남기독청년회의 연합 주최로 그 구제할 방법을 강구하여 29일 오후 8시부터 대구 만경관에서 '수해 구제 음악무도회'를 개최하고 그날 밤 실비를 제한 수입의 전부를 대구에 있는 이재민에게 기증할 예정인데, 이날 밤에는 대구 일류의 남녀 음악가가 일제히 출연하여 관현악을 처음으로 만도링, 바이올링의 독주와 합주가 있고 성악가의 독창과 4부 합창이 있으며, 조선 정악(正樂)의 이전 풍류까지 하고 끝으로 노서아(露西亞) 딴스와 기타 소녀단의 무도(舞蹈), 재미있는 막(幕)이 있을 터이라는데, 수해 이재민을 동정하는 마음과 취미있는 음악을 듣기 겸하여 큰 성황을 이루리라더라." (1924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그런가 하면 그 와중에도 관청과 개인의 꼴불견도 상당했다. "가뭄 끝에 장마. 장마 속에 해(日)로, 울며 불며 피난하는 사람들의 형상을 차마 못 볼만한 한강에서 어떤 자들은 자동차에 기생을 싣고 물 구경 다니기와 혹은 용금루(龍金樓)에서 뚱땅거리니, 몇십 원 몇백 원 물질로써 동정은 못 할망정 자기의 양심과 남의 정상(情狀)도 좀 생각함이 좋을 듯. 그 외에 진짜 여학생인지 가짜 여학생인지는 모르나 철교 위에서 일제히 권련을 피우며 돌아다니는 것은 아직 우리 눈에는 좀 볼썽사나운 걸." (1924년 7월 28일자 매일신보)

"대구부(大邱府)는 대구부의 기관지라고 일반이 인정하는 모 일문지(日文紙)에 '부청 조사에 의지하면 손해액은 2만 원가량이요 구제할 만한 자는 별로 없다'는 기사를 게재하여 은연히 구제의 책임을 벗으려는 악착한 태도를 가진다 하여, 분개한 이재민들은 이재민대회까지 개최하고 철저한 대책을 결의하였다는 소식이 들린다." (1924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어떻게 하든지 책임만 면하려고 손해를 축소해 전하고, 가엾은 백성의 슬픔에 눈을 돌리려고 하는 관리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홍수와 폭염 등의 자연재해를 사람의 힘으로 모두 예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를 복구하고 이재민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도 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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