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희칼럼] 공급 충분하다는 정부의 '근자감'
정부 대책 일관성없이 안이
확실한 공급신호 줘야
집값 폭등 막을 수 있어
일본의 20·30대 부부들은 내 집 마련이 삶의 목표가 아니다. 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떨어진다는 인식이 팽배해 저리로 대출을 해줘도 좀체 주택 매수에 나서지 않는다. 대신 임대주택을 선호한다. 1990년대 초 부동산 버블 붕괴의 학습효과다. 우리는 다르다. 2030에게 주택 장만은 자산 증식의 최고 수단이자 인생의 숙제다. 빨리 하지 않으면 집값이 득달같이 올라 기회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와 강박에 이들은 시달린다. '부동산 불패'의 학습효과다.
이런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지난 정부에서 나타난 사회현상이 영혼까지 끌어서 집을 산다는 '영끌'이다. 영끌이 불러온 부동산 참사는 정권 교체에 결정적인 한 방이 됐다. 영끌은 2021년 집값이 꺾이고 고금리가 이어지며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3년 만에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은행 가계대출은 올해 상반기에만 20조원 넘게 불어났다.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 깜빡이도 영끌을 부추기고 있다. 영끌 막차를 탔다가 고금리로 피눈물을 흘린 영끌족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시장이 조금만 틈을 보이면 영끌은 되살아난다. 툭하면 부동산 광풍이 부는 한국에서 영끌 망령은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다. 정부가 선제적으로 치밀하게 불씨 관리를 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정부 대응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오판과 닮아 있다.
공급 불안 관리부터 그렇다. 윤석열 정부는 집값이 조정기에 들어섰다. 부동산으로 폭망한 정권과 차별화를 꾀하려는 듯 2022년 8월 5년간 주택 270만가구를 공급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고금리와 공사비 상승 등으로 공급 계획표가 차질을 빚은 지 오래다. 그런데도 방관하다가 거래량이 늘고, 신고가가 속출하는 등 집값이 심상치 않자 최근에야 뒷북 공급 대책을 내놨다. 손에 잡히는 긴급 처방은 없었다. 그런데도 "공급은 충분하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정부는 입주 예정 물량이 충분하다지만, 향후 공급 가늠자인 인허가 물량은 올해 1~5월 전년 대비 24%나 줄었다.
이런 와중에 시장의 잠재 리스크가 될 수 있는 막대한 유동성을 푼 것도 문제다. 소득과 상관없이 저금리로 대출해주는 특례보금자리론은 지난해 40조원, 금리 1%대 신생아특례대출은 올해만 6조원이 풀렸다.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시행을 두 달 미루면서 '대출 막차 수요'까지 일으켰다. 문 정부 부동산 정책 설계자인 김수현 전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실패 요인으로 첫손에 꼽은 것이 "대출 규제를 더 강하게 하지 못한 것"이었다. 문 정부의 실책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인가.
당국의 안이한 인식도 비슷하다. 문 정부도 "주택 공급이 부족하지 않다"고 우겼다. 하지만 석 달 만에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은 공급 부족을 시인하며 "아파트가 빵이라면 밤을 새워서 만들겠다"고 한탄했다. 박상우 국토부 장관도 "일시적인 잔등락일 뿐"이라며 "앞선 정부와 같은 상황이 재연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장 불안을 과소평가한,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다. 앞서 경험했듯 집값은 한번 불이 붙으면 잘 꺼지지 않는다. 불안과 공포가 시장을 지배하며 가수요가 폭발하기 때문이다. 문 정부도 뒤늦게 3기 신도시 공급 확대 정책을 잇달아 발표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정부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근자감'과 '실책'이다. 정책 헛발질이 몇 번만 반복되면 시장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과열을 식히고 공급 절벽 불안을 잠재우려면 정부가 명확한 공급 신호를 줘야 한다. 3기 신도시 공급 속도와 물량을 재검토하고, 재건축·재개발이 속도를 낼 수 있게 규제를 푸는 등 방책을 총동원해야 함은 물론이다. 문 정부의 '미친 집값' 악몽 재연은 막아야 한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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