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아도 큰일 나지 않아 [똑똑! 한국사회]
유지민 | 서울 문정고 2학년
2년 전 여름, 나는 병적으로 완벽함에 집착하고 있었다. 일주일 단위로 짜놓은 계획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무척 불안했고, 스스로 육체와 정신을 압박하며 계획을 이루도록 채찍질했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만든 계획표에 끌려다니며 살았던 것이다. 꽤 자주 지인들에게 ‘너처럼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은 없을 거야’라고 칭찬받았다.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제 만족을 위해 시작한 일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어나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만뒀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그러지 못했다.
작년엔 자퇴한 고등학교를 다시 입학하며 더욱 강박감이 심해졌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취감보단 ‘다음엔 더 잘해야겠다’는 아쉬움과 성찰이 더 많이 쌓였다. 특히 상대평가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만큼 친구들을 경쟁자로 인식하며 받는 스트레스가 커졌다. 전학 온 처지에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친한 친구도 없어 더욱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 1학기 중간고사 기간엔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가량 학교에 가지 못했다. 어떤 위로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몇점을 받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당시엔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았다.
올해 2학년이 되고 더 큰 회의감에 휩싸였다.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도 무기력함과 자괴감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그 순간, 이전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나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고 조금 풀어줬던 것이다. 시험과 상관없는 글쓰기, 일본어 공부, 산책 등을 하고 부족한 잠을 자기도 했다. 공부량이 지난 시험보다 줄었고, 자연스레 성적을 잘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왜일까?
주변 사람들이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아.’ 이 문장이 실제로 성립한다는 것을 체험했다. 앞서 세워둔 계획을 전부 지키지 못했을 때 극심한 우울감을 느끼고 자책했는데, 빈도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더 나아가 애당초 계획을 세울 때도 일부러 기준을 낮춰서 설정하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하면 나오는 결과도 알았고, 기대한 만큼의 성적을 받지 못했을 때 느끼는 우울에서 금세 빠져나올 수 있게 됐다. 스스로 체감할 만큼 회복 탄력성이 강해진 것이다. 운이 좋게도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지속해서 도움을 주어 가능했던 일이다.
지난 2년간 나를 괴롭힌 양상들이 ‘강박성 성격장애’ 증상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대학교병원은 강박성 성격장애를 ‘사소한 세부 사항이나 규칙에 집착, 완벽주의, 지나치게 고지식하거나,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등의 완고한 성격’이라고 정의한다. 명명된 증상 중 ‘매사에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일이나 대인관계에서 만족감과 즐거움을 경험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오히려 이러한 감정을 억제하거나 철회시키고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는 대목에 특히 공감했다. 계획을 지키면 성취감과 자기 효능감을 얻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스트레스를 받았던 과거가 생생하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바라본 지금의 상황은 결코 긍정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고등학생으로서 성적은 삶의 무척 중요한 부분이니 말이다. 이번 학기의 성적을 만회할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아프다. 그러나 이 과정을 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우리는 육체가 아플 땐 꽤 기민하게 반응하고, 증상이 악화하면 곧 항체가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고 여긴다. 마음이 아플 땐 같은 사고방식을 적용하기 어려워한다. 증상이 극에 달했을 때 잠시 심리상담센터에 다녔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기 꺼려져 학원에 간다고 둘러댔다. 아직도 인터넷 커뮤니티엔 ‘정신과 진료 내용이 있으면 취업·입시에 악영향이 있을까요?’라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정신을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돌봐주는 일이 더욱더 자연스러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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