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괴물화를 거쳐 신인류로...'스위트홈'에 담긴 K콘텐츠의 포부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이 시즌3로 그 대미를 장식했다. 반응은 호불호가 분명히 갈린다. 국내 크리처물이 이만한 성과를 가시적으로 냈다는 측면에서 호평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시즌2부터 확장된 세계관을 그려내는데 실패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많다. 확실히 시즌이 거듭될수록 대중적인 관심은 식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스위트홈>이 시즌3까지 펼쳐낸 다양한 상상들과 그걸 구현해낸 성과들은 부정할 수 없다.
시즌3의 서사는 괴물이 된 자들이 죽음과 부활을 거쳐 신인류로 등장한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더해졌다. 신인류는 죽지 않는 존재가 되고, 그래서 중간 단계에 서 있는 특수감염인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신인류의 등장은 괴물화에 대한 반전의 인식들을 만들어낸다. 즉 시즌2에서 스타디움에 숨어 지내며 괴물이 되는 걸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괴물화 증상을 보이는 자들을 격리하려 했던 그 흐름은, 괴물이 되어야 그 다음 단계인 신인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새로운 욕망을 더함으로써 뒤집혀버린다. 괴물화 증상은 숨겨야 할 사실이 아니라 드러내도 되는 일이 되고, 오히려 스타디움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자격(?)처럼 취급된다.
물론 이건 이미 괴물화 단계에 들어선 이들의 입장이다. 괴물화 증상을 겪지 않은 인간의 입장은 또 그들과 다르다. 여전히 괴물이 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또 신인류로 돌아온 이은혁(이도현) 같은 인물은 죽지 않지만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인물로 욕망이나 두려움 자체가 없다. 이렇게 인간과 괴물 그리고 신인류라는 다양한 존재들을 동시에 세워놓을 수 있었던 건 <스위트홈>이 가진 독특한 세계관 덕분이다. 욕망이 괴물로 탄생한다는 세계관.
즉 이들이 괴물이 된 건 욕망 때문이다. 먹고 싶은 욕망, 날씬해지고 싶은 욕망, 강해지고 싶은 욕망, 누군가를 보호해주고 싶은 욕망 등등 저마다 가진 욕망에 따라 괴물들은 그 형상도 능력도 달라진다. 따라서 이들이 죽어 부활해 탄생한 신인류가 감정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 또한 의미를 갖는다. 욕망이 사라진 자들이라는 것. 즉 욕망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을 가르는 게 아니라 어떤 욕망을 갖는가가 다른 결과를 낼 뿐이라는 걸 <스위트홈>은 시즌3의 대혼전을 통해 그려낸다.
임박사(오정세)처럼 인간이지만 괴물 같은 이들이 존재하고, 정반대로 탁상사(유오성)처럼 괴물이 되지만 인간편에 서서 그들을 구하려는 욕망을 가진 이들이 존재한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고 그래서 인간이든 괴물이든 아무런 경계를 세우지 않는 아이(김시아)가 있다면, 괴물이 된 후에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서이경(이시영)이 있고, 괴물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 욕망을 되돌리게 함으로써 인간으로 돌려놓는 능력을 가진 차현수(송강)가 있는 반면, 괴물의 다음 단계로서 신인류가 되어 무감해진 이은혁이 있다.
<스위트홈>은 인간과 괴물, 신인류가 서로 싸우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저마다의 종들이 버텨내려는 생존의 이야기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러 인간과 신인류가 공존의 길을 찾아가고, 기다릴 곳과 돌아갈 곳으로서의 '스위트홈'이 필요하다는 걸로 끝을 맺는다. 기억은 있지만 감정이 없는 단계에 들어선 이은혁이 또 특수감염인으로서 살아온 차현수가 감정을 드러내는 미소를 짓는 엔딩신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돌아갈 곳이란 공간의 의미만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감정이라는 것 또한 그 장면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크리처물이 갖기 마련인 보기 불편한 장면들과, 시즌2부터 세계관이 확장되며 생겨난 복잡한 서사, 너무 많은 변종 크리처들의 탄생이 만들어낸 혼돈, 게다가 시즌3에 와서는 이들이 맞붙어 생겨나는 더욱 복잡한 서사들. <스위트홈>은 확실히 대중적인 작품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시도된 VFX 기술의 무한확장은 분명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과거에는 구현되지 않아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영역들을 <스위트홈>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이것은 마치 <스위트홈> 자체가 이러한 상상력의 확장에 대한 욕망에 의해 발현된 작품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욕망이 만들어낸 세계는 상상하기 어려운 괴물 같은 것들이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놀라웠지만 점점 더 커진 욕망이 그 세계를 확장하면서 기괴해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비판의 과정을 거치며 이제 감정도 배워나가는 신인류 같은 보다 안정된 K콘텐츠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는 걸 <스위트홈>은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호불호가 갈렸지만 <스위트홈>이 시즌3를 거쳐 거둔 분명한 성과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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