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부고 기사를 쓰려 했는데 이런 글이 되었습니다 [스프]
오비추어리(Obituary). 부고 기사를 뜻합니다. 해외 언론에서는 부고 기사가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필력 뛰어난 기자들이 부고 기사를 맡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마지막 페이지를 부고 기사에 모두 할애하고,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만을 모아 책으로 낼 정도입니다.
학전 김민기 대표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2일, '김민기 오비추어리'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겠다고 하고, 예정됐던 팟캐스트 녹화를 끝내고, 책상 앞에 앉아 '오비추어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영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포기하고, 퇴근 후 김민기 대표의 빈소를 찾았습니다.
영정 속 김민기 대표는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영전에 헌화하고 묵념하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전했습니다. "대표님, 항상 그 자리에 계셔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학전을 취재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많이 그리울 거예요. 잊지 않겠습니다.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다시 눈을 뜨고 영정을 마주하는데, 그 환한 웃음 앞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유족들과 인사하고 나와서도 한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문득 1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암 선고를 받고 투병 생활 1년도 안 되어 70대 초반에 돌아가셨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올해 73세로, 역시 떠나기엔 아직 이른 나이였습니다.
빨리 자리를 뜨기 싫었습니다. 빈소를 지키는 학전 옛 직원들, 안면 있는 배우들을 만나 인사하고, 김민기 대표를 추억했습니다. 문상객 중에 김민기 대표의 대학 시절 친구인 한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분은 '민기는 정말 그가 부른 노래 가사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며, 김민기 대표 이야기를 잘 써서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들으며 밤늦게 집에 돌아왔고, 계속 뒤척이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 어르신의 당부를 떠올리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역시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할 말이 너무 많기도 하고, 할 말이 없기도 했습니다. 김민기 대표를 떠올리면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이제 왜 글이 안 써지는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고인의 가족도 친구도 아니지만, 마치 아주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낸 듯한 슬픔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1998년 뮤지컬 '의형제'를 취재하며 김민기 대표를 처음 만났으니 취재원과 취재기자로 맺은 관계는 꽤 오래되었지만, 사실 자주 왕래하며 가깝게 지냈던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학전에서 새로운 공연이 올라갈 때 취재 가서 김민기 대표 이야기를 들었고, 공연을 봤고, 가끔 공연 뒤풀이에 함께 간 정도입니다. 코로나19 이후 몇 년간은 거의 만나지 못했고, 학전 직원들을 통해 안부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저에게 단순한 '취재원' 이상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아침이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학전에서 올라가는 공연들이 좋았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말수가 적었지만 항상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지하철 1호선' 3천 회 공연 같은 특별한 날마다, 학전을 거쳐 간 배우들이 다시 모여 정말 행복해하는 걸 봤습니다. 학전을 드나들며 취재한 시간이 쌓이면서, 학전을 거쳐 간 배우들이, 가수들이, 스태프들이 왜 그렇게 그를 따르고 사랑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어른'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이익이 아니라 원칙을 중시하는 고집, '앞것'을 빛나게 하려는 '뒷것' 정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헌신, 정직하고 치열한 예술혼. 그는 이렇게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명감에 불타서' 그렇게 살았다기보다는, '선량하고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그래서 '남들이 안 하니까 나라도 해야지' 생각했기에, 어렵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항상 화려하고 밝은 곳보다는 그늘 쪽을, 약자를 향했습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대도시 서울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잘 나가던 '지하철 1호선'을 멈추고 그가 몰두했던 것은 어린이 청소년 연극이었습니다. 상업적인 어린이 문화는 범람하는데, 진정 어린이들을 중심에 놓은 어린이 문화는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다른 물가는 올라만 가는데, 더 많은 어린이들이 봐야 한다며 오히려 티켓값을 내리기까지 했죠.
그러려고만 했다면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 덕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오롯이 혼자서 자신의 소명을 감당했습니다. 학전의 폐관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이들이 '학전이 배출한 그 많은 스타들이 조금씩만 도와주면 살리는 건 문제가 아닐 텐데' 하고 의아해했지만, 그는 이런 도움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전에서 가장 오래 일한 김성민 총무팀장이 김민기 대표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밝혔듯이 말이죠.
그는 자신이 시작한 일은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뜻이 강했습니다. 누구한테 이 짐을 맡기겠느냐며 학전 소극장을 닫기로 한 것도, 이름을 남기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을 겁니다. 학전은 곧 김민기였습니다. 유족들이 조의금과 조화를 사양한다고 한 것도 평소의 그를 떠올리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덕스럽고 이상하게 돌아가도, 돈과 명예를 좇는 이들의 아귀다툼이 아무리 심해져도, 김민기 대표는 항상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한결같이 묵묵히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로에 가면 변함없이 학전이 있고 김민기 대표가 있다는 사실이, 당시엔 깨닫지 못했지만 저에게도 커다란 위안 혹은 버팀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학전은 저에게도 고향집과 비슷한 곳이었습니다. 자주 가지는 못하더라도 찾아가면 항상 반겨주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만 같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저는 지금 큰 상실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김민기 대표가 떠난 지금, 새삼 그가 저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아. 저는 아무래도 오비추어리를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고인의 삶을 잘 정리한 부고 기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SNS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김민기 대표를 나름의 방식으로 추모하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저도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김민기 대표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을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학전에서 공연을 보고 뒤풀이로 몇몇이 맥주를 한 잔 했습니다. 당시 고양시에 살았던 저는 방향이 비슷해 귀갓길 김민기 대표와 함께 택시를 타게 되었습니다. 서울 근교와 도심을 오가는 '총알택시'가 있었던 시절인데, 신촌 기차역 앞이 총알택시 집결지 중 하나였죠.
역 앞에 택시를 쭉 세워놓고 모여 있던 택시기사들이 멀리서도 김민기 대표를 알아보고 '형님! 오늘은 좀 일찍 오셨네' 했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사실 유명 인사였으니까요. 기사들끼리 '오늘은 자네가 형님 모셔다 드려!' 하더라고요. 그렇게 택시를 타고 출발하는데 이전에도 자주 타서 아는 사이였나 봅니다. 기사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고 김민기 대표와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오늘은 많이 안 드셨냐, 어떻게 지내시냐, 이런 가벼운 이야기들 끝에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어제 시 한 번 써봤는데 말이죠, 형님 이런 거 잘 아실 거 같아서... 한번 좀 봐줘요."
"에이, 내가 뭘 잘 알아."
"그래도 우리보단 많이 배운 분이잖아요."
기사가 주섬주섬 꺼내 뒷좌석으로 넘겨준 종이쪽지에는 짧은 시가 한 편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옆자리였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풍경을 묘사한 시였던 것 같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시를 읽더니 웃으면서 '잘 썼네!' 하고 칭찬했습니다. 택시기사는 쑥스러워하며 '정말요 형님? 그냥 끄적거려 본 건데' 했고요.
택시기사가 시를 쓰고, 택시를 탄 김민기 대표한테 품평을 받는 상황이라니.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 웃음이 나왔습니다. 다음 신호등에 차가 서자 기사는 "얼마 전에 표가 생겼는데, 이 공연 어떨는지, 한 번 가봐도 될지 모르겠네요?" 하면서 무슨 공연 할인권을 보여줬습니다. 얼핏 봐도 엉성한 게 제대로 된 공연 같진 않았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아이고 이런 데 가지 말고, 다음에 우리 공연 초대할 테니 한 번 와서 보라고" 했습니다.
택시기사와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가, 저도 그날은 평소 하던 공연 관련 질문이 아니라, '왜 '아침이슬'을 안 부르시냐'고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 노래는 내 손을 떠났어요. 이미 내 것이 아니야" 했던 것도, "요즘 오디션 가보면 '아침이슬'을 부르는 놈들이 있다"면서 살짝 역정을 냈던 것도 기억납니다. '아침이슬' 부르면 바로 '탈락'이라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뮤지컬 노래가 아닌데 그걸 굳이 왜 부르냐고. 오디션에서 부를 노래가 아니지."
세월이 흘러 그날 밤 택시 안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희 집이 멀지 않아 금방 택시를 내려야 했기에 아쉬워했던 건 생각납니다. 택시 안이 참 따뜻했다는 느낌도 남아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표 내지는 않지만 정 많고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김민기 대표를 지난해 말 정재일 음악감독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연 콘서트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그날의 앙코르는 김민기 대표에게 바치는 무대였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음원에서 추출해낸 김민기 대표의 목소리에 정재일 감독의 기타 반주가 어우러졌습니다. 그날 객석에는 김민기 대표도 앉아 있었습니다. 공연장을 나서다가 안면 있는 학전 직원과 마주친 덕분에 김민기 대표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아끼는 후배의 공연을 보기 위해 힘겨운 외출을 한 그는 지팡이를 짚고 병색이 완연했지만, 낮고 깊고 따뜻한 목소리, 소탈한 웃음과 장난기는 여전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저기 편파 방송 기자 왔다. 학전만 좋아하는 편파 방송 기자!' 하고 농담을 던졌고, 정재일 감독에게는 '그렇게 남의 목소리 맘대로 갖다 써도 돼? 응?' 하고 짐짓 으름장을 놓으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날이 마지막 만남이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마지막이 되어버렸습니다.
학전이 있던 자리에 어린이 청소년 전용극장인 꿈밭극장이 문을 연 지난 17일, 객석에서 즐거워하는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김민기 대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빈소에서 만난 학전의 한 직원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했습니다. "대표님께 보여드리려고 그날 사진을 많이 찍었거든요. 아직 보여드리지 못했는데 며칠 만에 이렇게 돌아가실 줄은......"
24일 오전, 고 김민기 대표의 발인이었습니다. 고인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꿈밭극장을 거쳐 장지로 향했습니다. 저도 꿈밭극장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정말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학전을 거쳐 간 배우와 가수들,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 모여 고인의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고인의 영정을 모신 상주가 극장 앞마당과 극장 내부까지 돌아보고 나왔습니다. 저는 좀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은 일선 취재 부서가 아니라 뉴미디어 부서에서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어, 제가 현장 '취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아시테지 여름 공연축제가 열리고 있는 꿈밭극장은 날마다 어린이들의 즐거운 웃음으로 가득합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꿈밭극장 관계자에게 "김민기 대표님이 생전에 보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요" 했더니 "김민기 선생님이 보셨대요! 보시고 좋아하셨대요!" 했습니다. 김민기 대표가 별세 얼마 전에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꿈밭극장을 봤다는 겁니다. 감염 우려 때문에 차에서 내리지는 못했지만 학전이 어린이 청소년 전용극장 '꿈밭극장'으로 단장한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꿈밭극장을 들른 장례 차량이 장지를 향해 출발하기 조금 전부터 그쳤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부르기 시작한 '아침이슬'이 합창이 되었고, 차량이 빠져나간 극장 앞길 가운데 선 색소폰 주자가 홀로 '아름다운 사람'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무임승차' 밴드 멤버인 이인권 씨의 연주였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부른 김민기 대표의 목소리를 떠올렸습니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의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의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의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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