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의사 부족’이 지금의 환자를 고통받게 해선 안된다

한겨레 2024. 7. 2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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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88)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로 보는 의정갈등
10년 뒤 의사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지금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라는 정부의 말은 얼핏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사진은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포스터. 출처 아이엠디비(IMDb)

의대 증원과 관련하여 잘못된 주장이 전체를 휩쓸고 있으니, 그것은 “10년 뒤 의사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지금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라는 정부의 말이다. 얼핏 듣기로는 타당하다. 의사는 금방 늘릴 수 있는 인력이 아니고 오랜 훈련을 거쳐야 한다. 10년 뒤에 의사가 부족하다면, 지금 의대 숫자를 늘려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는데, 10년 뒤 의사가 부족할 것이라는 예상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그 해결책인 의대 정원의 증가가 가져올 피해가 더 크다면 애초에 주장으로서 성립되어선 안 된다. 10년 뒤 의사의 부족은 현재 환자들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애초에 의대 증원이라는 구호가 힘을 얻었던 것은 지금 당장 의료 체계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응급실 뺑뺑이”니 “필수의료 붕괴”는 10년 뒤 예상되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정부가 의대 증원을 제시했을 때, 이미 문제에 맞지 않는 열쇠를 꺼내 든 셈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현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정책이 오히려 현재 상황을 악화시켜, 당장 치료받아야 하는 환자들을 몰아세우고 있다는 데 있다.

아니 정부는 정책을 세웠을 뿐이고 지금 병원을 비운 것은 전공의이고 학교를 떠난 것은 의대생이지 않으냐고 물으신다면, 다시 생각해 보라. 정부의 정책 운용은 그렇게 근시안적이어선 안 된다. 그것도 계산하지 못했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면, 애초에 정책을 밀고 나갔으면 안 됐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모든 주장이나 상황은 무시하고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부에게 기대한다면, 왜 이런 거대한 조직을 우리는 그만큼의 돈과 인력을 들여 유지하는가. 그냥 한 사람이 정하고 밀고 나가면 될 일이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상황을 검토하고 고려하여 조정해서 일을 진행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정부와 조직이 있다. 전공의와 의대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만 의대 증원이 가능하다. 게다가, 응급실이나 지역 의료의 문제와 전공의 문제는 사실 동일하다. ‘지금’ 해당 조건으로 일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당장 벌어지는 응급실 폐쇄와 지역 의료 결핍을 해소하는 정책이 있어야만 의대 증원도 진행할 수 있다. 무엇보다, 환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정책은 설계되어야 하며, 정책을 이유로 환자에게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문제는 제대로 된 해결책이지, 누군가의 독단이 아니다. 현 상황을 바라보면서 나는 조금 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떠올린다. 켄 키시의 동명 소설을 밀로스 포먼이 영화화한 이 작품을, 많은 분은 정신병원의 폭압을 비판한 작품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신병원만을 영화가 비난의 대상으로 겨누었다고 생각한다면, 이 작품을 충분히 읽어내지는 않은 셈이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설득력을 띠는 이유는, 작품에서 정신병원으로 상징되고 있는 사회적 질서 유지 체계의 폭압에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공식 예고편 중 한 장면.

정신병원이 상징하는 질서 유지 체계의 폭압

작품은 주인공 맥머피가 형기를 감옥 대신에 정신병원에서 보내기로 선택하면서 시작된다. 그가 들어간 정신병원은 간호사 래치드의 통제 아래 있으며, 이 래치드라는 인물은 환자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폭력과 학대로 병원의 질서를 유지한다. 맥머피는 환자들이 병원과 래치드를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항하는 일들을 벌이며 병원의 질서를 뒤엎고자 한다.

한 번의 소동과 진압이 벌어지고 병원의 협박에 환자가 한 명 죽자, 맥머피는 이 건을 놓고 래치드를 비난하며 결국 물리적으로 공격하기에 이른다. 일은 정리된 것 같고 래치드는 한발 물러선 것 같다. 그러나, 사라졌던 맥머피는 뇌수술을 받고 인지능력이 크게 손상된 채로 발견된다.

이 영화, 1970년대 당시 정신병원의 인권침해 문제를 고발하려고 했던 것은 맞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전 세계적 흥행 이후, 토머스 사즈, 도널드 랭, 미셸 푸코 등이 주도한 반정신의학운동이 크게 힘을 얻으면서 정신병원 탈원화 운동, 즉 환자들을 시설에 가두는 대신 통원 치료를 하는 쪽이 큰 지지를 얻으며 현실 제도에 자리를 잡았다. 또한 외과적 수술은 최소화하고 약물과 상담 치료에 더 방점을 주는 쪽으로 정신건강의학과의 치료 과정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영화가 말하는 것은 정신병원 그 자체만은 아니다. 당시에도 저런 식으로 운영되지 않는 정신병원도 많았으므로, 누군가 모든 정신병원이 다 저런 식이라서 문제라고 말하면 그것은 합리적인 문제 제기가 아니다. 영화가 설득력을 띠는 이유는, 작품에서 정신병원으로 상징되고 있는 사회적 질서 유지 체계의 폭압에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사회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려 하고 그것이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때로 그 질서는 과도한 것이나 잘못된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슬프고 안타깝게도, 역사의 많은 사례가 그런 과도하고 잘못된 질서 유지를 이유로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해 온 일들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질서 유지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선을 넘어 그 구성원에 과도한 피해를 입힐 때, 질서 유지라는 명목은 계속 유지되어선 안 된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병원에 관한 이야기라서 더 친연성을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상황을 보면서 맥머피와 래치드를 떠올린다. 맥머피는 범죄자였으며, 심지어 형기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보내려고 감옥 대신 정신병원을 택한 약은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맥머피가 정신병원에서 다른 환자들을 위해, 그리고 잘못된 병원의 질서를 바꾸기 위해 한 행동들을 도매금으로 넘겨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영화의 악은 질서와 안정을 이유로 환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학대한 래치드였지, 죄인인 맥머피가 아니었다.

영화가 잘 보여주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질서와 안정이 현재 구성원에게 가해지는 과도한 피해를 정당화할 수 없다. 지금 환자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10년 뒤의 미래 예측이 정당화할 수 없는 것처럼.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간호사 래치드. 출처: 아이엠디비(IMDb)

10년 뒤가 지금의 환자 피해를 정당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래를 위해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 있다. 마치 지금의 주장은 미래에 이득이 되는 것이라도, 현재에 피해를 가하는 일이라면 허용해선 안 된다는 식으로 읽힐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그렇게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일들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현재의 손해 또는 피해 감수로 이루어진다. 내 주장은, 그중에도 그래선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10년 뒤의 문제라는 현안으로 돌아가 보자. 일부 초고령층이나 환자 중 10년 뒤에는 사망할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10년 뒤에도 지금 인구의 대다수는 살아 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10년 뒤와 지금의 인구적 비교는 거의 유사한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이 인구를 한 개인으로 가정한 다음, 한 사람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자. 누군가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다면, 그 노동으로 인해 특정 장기에 손상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밝은 광량 아래서 작은 물건을 보아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10년 뒤에 시력이 상당히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10년 뒤의 시력 감퇴를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은 누구나 납득할 만한 일일 것이다. 눈의 피로를 풀어주는 운동을 하고, 관련 영양제를 챙겨 먹는 것 정도는 충분히 그럴듯한 접근이다. 심지어, 일을 조금 조절해서 중간에 쉬는 시간을 넣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10년 뒤에 시력이 상당히 떨어질 것이 예상되므로 허리 수술을 해서 몸을 특정한 각도로 고정시켜, 최대한 시력이 떨어지지 않는 위치로 자세를 바꾸어 버리겠다고 누군가가 제안한다면 나는 그의 제안을 의심해야 한다. 누구나 10년 뒤 시력이 상당히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해도, 그런 수술은 과도하며 그 결과가 보장되지도 않은 데다가 무엇보다 그로 인한 피해가 너무 막심하기 때문이다. 시력의 보존보다 허리 수술로 입는 피해가 더 큰데, 왜 수술을 해야 하는가.

현재 상황도 마찬가지다. 의사의 부족을 이유로 정책을 수립하고 운용할 수 있다. 그것이 국가의 책무인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해당 정책의 정당화는 환자 피해의 최소화를 가정할 때에만 이루어진다. 아무리 좋고 필요한 일이라도, 지금의 무리한 피해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환자의 목숨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벌어진 일부터 수습해야 한다. 전공의와, 의대생과 만나고, 비어가는 응급실과 필수의료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왜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않는가. 의대 증원, 그다음에 이야기한다고 그렇게 늦을까. 정말 ‘10년 뒤’의 일인데 말이다.

김준혁 | 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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