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을 미워하지 않는 방법 [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한겨레 2024. 7. 2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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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문제의 해결과는 별개로 아래로부터 연대하는 길은 없을까? 사실 우리에겐 그 길밖에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도 같은 라인, 같은 공장에서 일하면 공감도가 높아진다. 서로 만나고 섞이기 때문이다.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통계를 동원해서 계몽하는 것보다 서로 만나는 게 낫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조형근 | 사회학자

2012년이던가, 한달쯤 중국 여행을 했다. 첫 여행지 상하이에서 관광에 나선 첫날, 광장에서 중국인 남녀 청년들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한국을 좋아한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전통차 쇼를 보러 가자고 권했다. 재미있겠다 싶어 따라갔는데 으슥한 뒷골목 2층, 사람 없는 어두운 가게였다. 건장한 청년들 사이에서 공포가 밀려왔다. 전통 의상의 중국 여성이 차 따르는 쇼를 하며 찻잔을 건넸다. 마셔도 괜찮을까, 오만 상상이 들었다. 심장이 뛰고 진땀이 흘렀다. 이윽고 계산을 하는데 9만원이 넘었다. 간장 종지 같은 차 다섯잔에. 돈을 내고 황급히 빠져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혼자 다녀서였을까? 가는 곳마다 그런 청년들이 다가왔다. 중국이 지긋지긋해졌다. 연구년으로 머물고 있던 중국 전공의 선배 연구자를 만나 마음을 털어놓았다. 선 넘는 말도 했다. 지하철에서 냄새가 나서 머리가 아프다고, 발전한 도시라는 상하이가 왜 이러냐고. 위로하던 선생님이 입을 다물었다. 마음앓이 중에 문득 몇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동북지방 다롄에서 겪었던 일이다. 학회의 답사여행 중 자유시간에 혼자 공원에 갔다. 공중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니 가운데 아랫니가 없었다. 임플란트 시술을 하며 끼워둔 임시 치아가 사라진 것이다. 총무라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데 영구 꼴이 됐으니 날벼락이었다.

어디서 빠졌을까? 초코바 먹다가 버린 기억이 났다.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악취에다 파리떼가 들끓었다. 더운 날이라 땀도 비 오듯 흘렀다. 그때 중년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무얼 하느냐 묻는 듯했다. 난감해서 웃는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앞니 빠진 꼴을 보았으리라. 그녀가 같이 쓰레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만류해도 계속했다. 나처럼 땀도 줄줄 흘렸다. 10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찾았다! 봉지 속 초코바에 플라스틱 치아가 박혀 있었다. 자기 일처럼 기뻐하던 그이가 갖고 있던 자바라 물통을 기울이며 씻으라고 손짓했다. 씻은 치아를 제자리에 넣었더니 어린 딸아이와 함께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나도 웃었다. 셰셰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도 생각난다. 낯선 외국인에게 그토록 큰 친절을 베푼 사람이.

상하이의 청년도 다롄의 그녀도 모두 중국인이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이 다 있다. 어느 나라든 그렇다. 작은 경험으로 전체를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같은 사람조차 때로 좋은 사람이, 때로 나쁜 사람이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의 상처가 누그러졌다. 냄새 이야기를 꺼냈던 게 부끄러워졌다.

상주 외국인이 5%에 달하는 시대다. 이들과 어떻게 살아야 할까? 크게 두가지 태도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아름다운 다문화’ 지향이고, 다른 하나는 ‘이주민 혐오’다. 다양한 문화 차이를 이해하며 공존하자는 다문화 지향은 정부의 정책 방향이기도 하다. 실질은 꽤 다르다. 고용허가제 아래서 홀몸의 이주노동자는 일정 기간 일한 뒤 귀국하게 되어 있다. 번 돈을 고국에 송금하고 한국 사회와 거의 접촉하지 않는다. 결혼이주민에 대한 정책은 한국 문화에 적응하라는 동화정책에 가깝다. 한국 사회도 바뀌자는 의미의 ‘다문화’는 아니다. 난민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구두선의 다문화정책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이주민 혐오의 저변이 넓기 때문이다. 몇년 전 예멘 난민 500여명이 제주에 왔을 때 갤럽의 여론조사에서는 최소한만 수용하거나 전부 강제 출국시켜야 한다는 답변이 82%에 달했다. 왜 이리 싫어할까? 이주민이 일자리를 빼앗고 범죄를 저지르며 복지 재정을 축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젊을수록,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이렇게 믿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실상은 다르다. 고용허가제상 이주민 고용은 내국인을 구하지 못할 때만 가능하다. 높은 외국인 범죄율은 이주민 중 젊은 남성의 비중이 높아서 생긴 착시다. 성별, 연령대별로 나눠 비교하면 외국인의 범죄율이 훨씬 낮다. 대개 젊은 층이니 건강보험 재정은 오히려 흑자다. 이런 사실을 알게 돼도 믿음을 바꾸는 경우는 많지 않다. 믿음은 힘이 세다.

사실 외국인 혐오만 문제인 건 아니다. 한국인은 자기들끼리도 미워한다. 한국인의 41%는 정치성향이 다르면 밥도 같이 먹기 싫어하고(조선일보, 2022년 12월), 절반 이상은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이 나 또는 자녀의 결혼 상대가 되는 걸 불편해한다(경향신문 2023년 12월). 이주민 혐오는 이 적대감의 연장일 것이다. 물론 차이도 있다. 한국인끼리는 부딪치며 살 수밖에 없다. 이주민에게는 ‘돌아가라’는 말이 가능하다. 그래서 더 심각하다.

이미 한국은 이주민 없이 살 수 없는 나라다. 공장도, 농장도, 건설현장도, 병원도 이주민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세계 최저 출생률을 당분간 벗어나기 어렵다는 걸 감안하면 갈수록 더 많은 이주민이 올 수밖에 없다. 가족을 이뤄 안정적으로 일하고 한국 사회에서 돈 쓰며 살 수 있도록 고용허가제를 개선해야 하고, 출신국 문화를 존중하는 다문화 정책이 필요하다. 난민 인정률과 인도적 체류 허가 비율을 높이고, 인권을 무시하는 자의적인 외국인 정책도 고쳐야 한다.

방향은 뻔해도 실행은 어렵다. 불평등 문제가 개입된 탓에 더욱 어렵다. 일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지 않는 상위 중산층이 이주민에게 관대하다. 삶이 불안한 중하층, 청년세대가 적대적이다. 힘없고 약한 이들이 서로 미워한다. 불평등 문제와 이주민에 대한 해법이 얽혀 있는 이유다.

구조적 문제의 해결과는 별개로 아래로부터 연대하는 길은 없을까? 사실 우리에겐 그 길밖에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도 같은 라인, 같은 공장에서 일하면 공감도가 높아진다. 서로 만나고 섞이기 때문이다.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통계를 동원해서 계몽하는 것보다 서로 만나는 게 낫다.

지난 토요일, 우리 동네 협동조합 책방에서는 미얀마 평화를 기원하는 낭독회가 열렸다. 미얀마, 일본, 중국 출신 이주민이 한국인 선주민과 함께했다. 네 나라말로 같은 소원을 빌었다. 아름다운 다문화의 꿈보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나눴다. 당신 옆에도 이주민이 산다. 만날 일도 만들 수 있다. 일단 시작하자. 함께 걷다 보면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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