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초등의대반法’, 다 같이 앉아 영화 보게 할까
초등의대반 퍼져도 속수무책
문제는 24년 전 헌재 위헌 결정
논란 없게 법안 다듬어 보았으면
‘과외 과열 경쟁은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 외에도 학생의 창의성과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의 결여, 학교 교육의 황폐화, 상대적 박탈감 등 여러 부작용을 초래하는 바, 학부모는 이를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자기 자녀의 이익만을 위해 병리 현상 심화에 기여하는 주역이자 동시에 희생자가 됐다.’
교육학자가 쓴 글이 아니다. 2000년 헌법재판소가 과외 금지 조치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밝힌 내용 중 일부다. 사교육 과잉의 폐단과 확산 구조를 잘 정리한 것 같다.
24년이 지난 지금은 더 상황이 나빠졌다. 교육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걱세)’이 이달 초 전국적으로 초등 의대반이 성행하고 있다며 ‘초등 의대반 방지법’ 제정을 제안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단체는 서울 지역 학원들의 초등 의대반 커리큘럼을 분석했더니, 초5를 대상으로 39개월 만에 고3 이과 수학을 끝내도록 하고, 심지어 초3에게 고2 수학 과정인 미적분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교육부는 23일 학원가를 특별 점검한 결과, 선행 학습을 유발하거나 거짓·과장으로 의심되는 광고 130건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처벌 규정이 없어 단속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초등의대반을 거쳐 한 학생이 의대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헌재에서 언급한 대로 여러 부작용만 떠오를 뿐이다.
사걱세는 올가을 국회 제출을 목표로 이 법 추진을 위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호응이 좋다고 한다. 이 단체는 10여 년 전 선행학습금지법을 처음 제안한 곳이고 실제 공교육에서 선행 학습을 금지하는 입법까지 됐다.
‘초등 의대반 방지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자는 것일까. 이 단체에 알아보니 현재 법 조문을 만드는 과정인데, 사교육 선행 학습 중에서도 학교급(級)을 뛰어넘는, 그러니까 초등학교에서 고교 과정을 선행 학습시키는 것은 방지하자는 조항을 현행 선행학습금지법에 넣는 것이 골자라고 한다. 초등 6학년이 겨울방학 때 중학교 과정을 미리 예습하는 것, 영재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경우까지 규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과잉 사교육, 선행 학습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일어서서 영화 보기’가 자주 쓰였다. 영화관에서 일부 관객이 일어서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뒷좌석 관객도 줄줄이 일어서서 볼 수밖에 없다. 다 같이 과잉 사교육을 안 할 수 있는데, 일부에서 시작하자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피곤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법을 만들면 다같이 앉아서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헌재는 지난 2000년 사교육 과열의 폐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위헌 결정을 내렸을까. 당시 결정문을 보면 헌재는 고액 과외 교습을 금지하는 것 자체가 위헌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고 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최소로 침해하는 수단을 선택해야 하는데 너무 광범위하게 규제했다는 것이 핵심 이유였다.
규제가 능사는 아니겠지만, 과잉 입법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겠지만 초등의대반 같은 망국적인 현상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는 데 많은 국민이 동의할 것이다. 24년이 흘렸으니 헌재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다. 저출생으로 고객이 점점 줄어드는 사교육 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더욱 위헌 시비를 최소화하면서도 과도한 선행 학습 피해를 줄일 수 있는 핀셋 대책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교육부도 변죽만 울리는 대책만 내놓을 것이 아니라 ‘초등 의대반 방지법’처럼 그물을 넓게 쳐서 사교육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더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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