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아름다운 사람
청나라 관리 박명은 현판 글씨를 잘 쓰기로 소문이 났다. 그가 다른 글씨는 그만 못한데 유독 현판 글씨만 잘 쓰게 된 사연이 있다. 해마다 북경에 들어가는 조선 사신과 역관들이 단골 상점 주인의 사위였던 그에게 당호(堂號)를 담은 현판을 부탁하곤 했는데 늘 그게 그거여서 같은 글씨를 하도 여러 번 쓰다 보니 잘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이 이야기를 전하며, 호는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것인데 사물(四勿)이나 삼성(三省), 눌와(訥窩), 묵재(墨齋) 따위를 너도나도 쓰는 현실을 풍자했다.
박지원이 예로 든 호는 대부분 <논어>에서 따온 것이다. 그 가운데 눌와는 “군자는 말은 굼뜨고(訥) 행동은 재빠르게(敏) 하고자 한다”라는 말에서 가져왔다. 말 잘하는 것을 경계하고 차라리 어눌하게 살겠노라고 표방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말은 상황마다 적실하고 균형 있을 뿐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다. 위 구절은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겠다는 뜻을 강조하는 문맥이니 공자가 지향한 것은 눌(訥)이라기보다 민(敏)이 아니었을까.
김민기(金敏基)님을 추모하는 글이 이어지는 중에 그동안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던, 이름에 쓰인 한자가 문득 눈에 들어온다. 어눌해 보일 정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분은 번번이 시대의 현장에 있었다. 누군가를 적으로 몰거나 투쟁을 선도한 적 없는 그분의 서정적인 노래들이 왜 그렇게 치열한 곳에서 많은 이들에게 불리며 울림을 주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무 말도 하기 전에 이미 아픔의 자리에 가 있고, 무언가 가르치려 하기 전에 먼저 공감의 깊이에 이른 분. 척박한 문화를 탓하기보다 그저 묵묵히 뮤지컬로, 아동극으로 문화의 길을 앞서 보여주신 것도, 그렇게 이해된다.
나직한 음성 하나하나가 마음으로 들어오는 ‘봉우리’, 맑고 슬픈 서사가 입에 감기면서 가슴을 감싸는 ‘백구’, 그리고 무던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한발 한발 걸어가던 그분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사람’…. 어눌하기는커녕 너무나 아름다운 그 노랫말들을 다시 천천히 되뇌며, 공자가 진정으로 추구한 문질빈빈(文質彬彬)을 감히 떠올린다. “잘 가시오, 친구여. 부디 안녕히.”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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