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낯선 사이]흑인 문학과 민족 문학
인종선(人種線) - 흑인 쫀슨에게
밖에선
세차게 씽씽 눈발이 휘몰아치는 밤
조고마한 온돌에 발을 녹이며
두터운 입술에서
굵다란 눈물방울 떨치는
쫀슨 너의 이야기
쇠사슬 늘이어
흑노(黑奴)의 아들로서 시장에 팔려온
이제는 고이 쉬는 할아버지는
시아고에 활발한 인종선에
무지한 백인이 던지는 벽돌에
집앞에서 쓰러졌으며
이리하여
원수를 갚겠다는 미친 아버지마저
식칼에 찔리어
길바닥에 자빠져버렸다
원통함이여
색(色) 있는 슬픔이여
웃집에선 여인마저 까귀에 찍혔다
탄환은 사정없이 가슴패기를 뚫으는구나
하수도에 떠가는 검은 송장들
멀리 흑노가 닦아논
오구라하마에 가모라이나 테기사쓰에
지주는 이들의 몸뚱아리에 못을 치고는
나무에 불을 지피는……
며칠이 지난 뒤 살육은 끄쳤다
그러나
또다시 뒤끓는 백인의 폭도들
언제나 인종선은 끝맺는 것이냐
쫀슨이여
홀어머니의 자식이여, 그렇다
인종선은 늬 곳에만 있는 줄 아느냐
동무들이 찬미하던 이 땅에서도
나라 있는 곳마닥
온 세계에 전선은 펼쳐 있는 것이다
- <1946년판 조선시집>, 이문각, 1947
해방 직후 활동했던 시인 배인철(裵仁哲·1920~1947)은 1946년에 ‘인종선(人種線) - 흑인 쫀슨에게’를 발표했다. 시에 등장하는 “시아고(市俄古)”는 시카고의 음차이다. “오구라하마”는 오클라호마, “가모라이나”는 캐롤라이나, “테기사쓰”는 텍사스로 추정된다. 제목 ‘인종선’은 노예를 실어 나르던 상선(商船)이 아니라 경계를 의미하는 ‘선(線)’이다. 흑인이 쓴 작품이라고 할 만큼 흑인의 역사적 고통이 절절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8·15 ‘해방’은 민족의 의사와 무관하게 점령군의 일원으로서 흑인이 남한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한반도 역사에 놀라운 사건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당시 흑인은 미군으로 통칭되어 특별히 기사화되지 않았고 미군 범죄의 일환으로만 재현되었다.
한국 문학 사상 최초로 흑인 문학을 개척한 배인철은 27세의 나이에 대낮 서울 남산에서 흉탄에 의해 사망했다. 시인 김수영을 비롯해 많은 지인들이 경찰 조사로 고초를 겪었을 뿐,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만일 배인철이 좀 더 오래 생존했더라면 한국의 탈식민 문학의 향배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인종선-흑인 쫀슨에게’를 포함 ‘노예해안’ ‘쪼 루이스에게’ ‘흑인녀’ ‘흑인 부대’ 등 모두 다섯 편의 흑인 관련 시를 남겼다. 배인철은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니혼(日本)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귀국, 해방 후 외국인의 출입이 잦았던 인천에서 통역관과 제물포고등학고 영어 교사로 일했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조직원이었는데, 최근 어느 보수 언론은 배인철을 “남로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가 흑인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일본 유학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흑인 문학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배인철은 흑인들의 운명을 조선인인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했다. 80여년 전 이런 시가 쓰였다니, 지금 한국인들의 흑인에 대한 인식을 생각할 때 ‘의외의’ 문학적 성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흑인, 대상이 아닌 주제
폴란드계 영국의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1857~1924)의 중편소설 ‘하트 오브 다크니스(Heart of Darkness)’는, 아프리카를 소재 혹은 배경으로 ‘유럽인 자신’을 설명하고자 한 다른 작품들 - <아웃 오브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여왕> 등 - 과 달리 유럽이 아프리카와 맺는 관계 그 자체에 천착했다는 점에서 탈식민주의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어둠의 심장’ ‘어둠의 심연’ ‘어둠의 속’ ‘암흑의 핵심’ 등으로 다양하게 출간되어 있어, 원제 ‘하트 오브 다크니스’로 표기한다).
해방기 한국 사회는 갑자기 들이닥친 미국과 미군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인철은 ‘미국’을 해체적으로 사유했다. 미군 내 흑인의 존재를 주목하면서 그들과 친교하고 연대 의식을 가진 시인의 생애는 놀랍기만 하다. 더구나 흑인을 소재나 대상으로 삼은 시가 아니라 뚜렷한 연대 의식 아래 타자화하지 않은 시인의 사상은 더욱 평가, 연구되어야 한다.
배인철은 ‘인천의 시인’, ‘흑인 문학’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이는 자랑스럽고,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주 활동 무대가 ‘인천 지역’이 아니라 서울이었다면 그의 시가 더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기존의 민족 문학에서 ‘인천 문학’과 ‘흑인 문학’의 위치는 어디인지 묻고 싶다. 민족의 개념, 민족의 구성원은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이슈다.
해방기, 좌우 문단을 막론하고 무수히 발표된 비평문과 작품들 중 흑인에 관한 것은 1949년 1월에 발간된 ‘신천지’의 ‘흑인 문학 특집’ 외에는 드물다. 문학평론가 최명표에 따르면, 당시 지식인들은 소위 민족 문학 건설을 테제로 삼아 상대편과 이념의 선명성을 경쟁하느라 골몰했다. 최명표는 그들의 행태는 민족을 명분으로 내세워 집단적 이익을 추구하였으나 배인철은 흑인의 처지를 민족의 것으로 전이시켜 문학적 보편성을 근접했다고 본다.
민족의 범주는 누가 정하는가
문제는 ‘민족 문학’이냐 ‘보편적 문학’이냐가 아니다. 실상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어떤 담론 권력이 민족 문학 혹은 민중 문학을 구성하는 데 개입하고 있는가이다. 누가 민족 구성원을 정하는가. ‘민족 구성원’인 나의 지인들이 읽고 쓰는 퀴어 문학, 여성주의 문학은 민족 문학이 아닌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명대사처럼 “노예와 백정도 (그대가 구할) 조선에 포함”되어 있는가? ‘민족’에는 여느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배제와 포함의 원리가 작동한다.
나는 매년 3월과 8월에 긴장하는 ‘민족 구성원’의 한 사람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독도를 앞세운 민족주의의 열풍이 불편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는 이 이슈들을 대표적 민족주의 의제로 정해 놓은 듯하다. 물론 실질적 해결의 관점보다는 시사, 여론몰이, 상업주의의 성격이 강하다.
여성학자 김은실의 지적대로 군 ‘위안부’ 이슈가 전시 성폭력이 아니라 식민지배 치하에서의 피해로만 인식될 때, 독도 문제가 생태주의가 아니라 영토와 주권 영역으로만 논의될 때 이익을 보는 ‘민족 구성원’은 누구일까. 한·일 간 군사적 감정적 긴장만 고조시키는 방식의 민족주의적 접근으로 이익을 보는 집단은 통치 세력이다. 국민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초국적(超國籍), 초국적(超國的) 연결이 필요하다. 국가 내부의 약자들이 국적을 초월해 연대했을 때 ‘진정한 보편성’ 즉 차별을 봉합하지 않는 열린 보편성이 만들어진다.
배인철은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미국과 소련을 좋게 볼 것인가, 나쁘게 볼 것인가라는 식의 논의에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미국 사회 내부의 약자와 식민지 조선을 동일시했고 몰두했다. 이러한 그의 의식은 특히 ‘黑人女’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여성의 몸은 인종, 계급, 종교, 이념 갈등의 전쟁터(Women’s Body Is a Battle Ground)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50년 후 서구 페미니즘 인식을 예견한 것이다.
민족 개념, 민족주의 자체에 대해 필요하다 혹은 나쁘다는 등의 주장을 넘어 배인철의 시는 민족의 주체를 확장시켰다. 미국으로부터 억압받는 미군정 시기 남한 사회가 흑인, 여성 등 미국 내부의 인종적 젠더적 약자와 연대하려면 기존의 민족 범주를 초월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한 것, 아니 불가피한 현실은 27세라는 짧은 생애에 꽃핀 배인철의 흑인 문학이, 그가 일본이라는 제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일본’도 ‘영문학’도 균일하지 않다. 트랜스 내셔널, 즉 민족을 초월한 실천은 민족이 처한 곤경과 억압을 부정하는 주장이 아니다. 민족이든 국가든 여성이든 흑인이든 아시아인이든, 모든 집단 내부 구성원의 지위와 상황은 평등하지 않다. 내부의 차이에 주목하고, 집단 정체성의 이름으로 ‘이중의 희생’을 정당화하지 말자는 얘기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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