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단도직입] “교제폭력엔 명확한 전조 증상…‘강압적 통제’ 범죄로 처벌해야”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여성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여성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했으며,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소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2017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을 거쳐 현재는 입법조사연구관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관심 분야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최근에는 ‘너 같은 피해자를 본 적이 없다’ ‘성폭력 피해자를 처벌하다’ 등 성폭력 무고를 연구하고 글을 썼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여성운동의 흐름과 역사를 담아 출간한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공동 필자로 참여했다.
“헤어지자”고 했을 뿐이다. 그 말이 방아쇠가 됐다. 지난달 7일 경기 하남시 아파트단지에서, 지난 5월 서울 강남 건물 옥상에서 여성이 살해당한 까닭은 모두 이별 통보 때문이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보도를 취합한 집계를 보면, 지난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138명에 이른다. 국내에서만 한 해 100명이 넘는 여성의 목숨을 빼앗는 이 범죄엔 아직 법적 정의가 없다. 이름이 없으니 교제폭력은 형법상 폭행·살인 등과 합산될 뿐 정부 공식 통계도 없다. 그러는 사이 교제폭력 신고는 2017년 1만4136건에서 2023년 7만790건으로 400% 증가했다. 정부의 무관심과 교제폭력 범죄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한 입법 공백 등이 겹쳐진 결과다. 이별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여성들을 위해 국가와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난달 ‘거절살인, 친밀한 관계 폭력 규율에 실패해 온 이유’라는 보고서를 낸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 입법조사연구관을 지난 18일 국회에서 만났다. 허 연구관은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을 제대로 개정해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까지 포괄적으로 예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조속한 입법을 촉구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새로운 법만 추가할 게 아니라 기존의 성폭력 법체계를 피해자 보호 취지에 맞춰 재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교제폭력엔 ‘강압적 통제’라는 명확한 전조 증상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강압적 통제’를 범죄로 처벌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허 연구관은 교제폭력에 대한 법적 정의도 통계도 없는 것은 “이 사건을 국가가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라며 “국가는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폭력을 범죄화하는 데 망설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교제폭력이 급증하고 피해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여성을 폭행하고 죽게 만들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 결과”라면서 “‘앞으로 더 많은 여성들이 희생될 것 같은 불안감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도 교제폭력을 불운한 개인의 문제로 끝낼 것이 아니라, 성불평등 구조가 투영된 사회 병리 현상으로 진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도 사회도 여성에 대한 폭력을 범죄화하는 데 여전히 망설여
범죄 늘고 흉악해지는 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지 못한 결과
아직 법적 정의도, 정부 차원 통계도 부재…‘입법 공백’ 뻥 뚫려
여성혐오가 낳은 병리현상…언제까지 불운한 개인 문제로 끝낼 건가
현행법 ‘처벌 불원·상담 조건부 기소유예’ 등 독소조항 제거를
- 최근 유튜버 쯔양이 전 남자친구에게 폭행·협박을 당하며 수십억원을 뜯겼다는 고백에 국민들은 공분했습니다. 법 사각지대에 있는 교제폭력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목소리가 거셉니다. 교제폭력 등 젠더폭력을 연구하며 느낀 문제의식은 무엇인지요.
“친밀한 관계에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범죄화하는 데 정부, 우리 사회가 굉장히 망설이고 있다는 점이죠. 그러다 보니 피해자나 그 가족 보호도 못하고, 가해자 처벌도 제대로 하지 않았어요. ‘두 사람 간 다툼’ 정도로 사적인 관계에까지 기관이 개입하고 공권력이 들어가야 될 필요가 있느냐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 사건의 심각성을 가리고 있다는 점도 뼈아픈 일입니다.”
- 위험 징후는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교제폭력에 관한 법적 정의도, 공식 통계도 없습니다.
“국가 통계가 없다는 것 자체가 국가가 이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예입니다. 지금은 살해당한 여성의 수 통계만 있거든요. 그중에 어느 정도가 친밀한 관계에 의해서 살해당하는지에 대한 정부 차원의 통계가 없다는 것은 국가가 여성이란 이유로 얼마나 죽임당하는지에 관심이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교제폭력이 성불평등에 기반한 사회 시스템의 문제이고, 이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야 될 여지가 있다는 인식이 바탕이 돼야 통계가 나올 텐데, 그저 개인의 불운한 문제로 끝내기 때문에 관련 통계 집계를 안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당연히 입법 공백이 뻥 뚫려 있고요.”
- 수집되지 않은 데이터가 또 있을 것 같은데요.
“중요한 통계이나 우리나라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통계가 하나 있어요. 바로 교제폭력 피해자이면서 자살한 여성들의 숫자예요. 다른 국가들은 자살자를 집계하고 사망 리뷰를 하는데 우리는 이에 대한 아무 아이디어가 없어요.”
- 그렇다면 교제폭력 정의를 내린다면요.
“교제폭력은 ‘친밀한 관계 또는 현재 교제 중인 또는 교제하였던 사람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체적·정서적·경제적·심리적 폭력을 말한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해외에서는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이라고 폭넓게 명명합니다. 교제폭력엔 유형이 있는데요. 그중 신체적인 폭력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지만, 가시적으로 판단되지 않는 폭력들이 있어요. 바로 경제적 착취예요. 쯔양 같은 경우, 신체적 폭력에 더해 경제적 착취까지 당했잖아요. 또 다른 하나는 정서적 폭력, 강압적 통제 행위가 있어요. 문제는 통제 행위는 피해자가 아니곤 주변에서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에요. 가해자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빨리 확인해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들은 제3자의 눈으로 봤을 때는 애정으로 오인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통제 폭력이에요. 이런 통제 행위를 법적으로 규정해 놓지 않으면 수사관이 봤을 때는 피해자가 다친 것도 아니고 협박당한 것도 아니라고 보고 넘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피해자 사망 사건들을 보면, 사망하기 전에 엄청난 수준의 통제하에서 고통을 받았어요.”
- 교제폭력을 막지 못하는 원인으로 강압적 통제 행위를 규제할 혐의 부재를 짚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뭔가요.
“현재 교제폭력은 별도로 규정한 법이 없어 형법의 폭행·협박죄를 적용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피해자가 원하지 않을 경우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에 해당돼 피해자에게 모든 부담을 전가해요. 피해자 입장에서는 한때 사귀던 사람을 고발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도 있어 마음을 바꾸는 비율이 굉장히 높아요. 또 가해자가 풀려난 이후 보복당할까봐 두려워 처벌 의사를 밝히길 꺼리게 되죠. 결국 피해자가 죽거나 거의 살인 미수 정도의 중상을 입는 피해가 가시화돼서야 비로소 수사기관이 개입을 하는 거예요. 그때는 너무 늦어요. 피해자가 죽은 다음에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미리 개입해서 막아야 피해자가 살 수 있어요. 교제폭력엔 강압적 통제라는 명확한 전조 증상이 있거든요.”
- 교제폭력이 갑자기 늘어난 건가요, 아니면 그간 알려지지 않았다가 차츰 드러나고 있는 중인가요.
“늘고 있을 뿐 아니라 훨씬 흉악해졌어요. 왜 많이 늘어났나 보면, 여성 혐오가 배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혐오는 여성이 밉다가 아닙니다. 여성 혐오자들은 여성을 되레 좋아해요. 다만 순종적이고, 자신의 지시에 따르는 여성을 좋아하는 것이죠. 일부 젊은 남성들 사이에 자신들이 불안정한 이유가 ‘여성들이 우리 것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혐오 정서가 깔려 있어요. 이는 정치권이 조장한 것도 있고요. 얼마 전 한 서울시의원이 한강 투신 남성 비율이 높은 이유를 ‘여성의 사회참여’ 탓으로 돌리더라고요. 기가 막히죠. 지금 남성들이 딱 그 마음이랄까요. 이런 갈등을 혐오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쏟아내는 현상으로 보여집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여성을 폭행하고 죽게 만들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 결과예요. ‘잘못된 신호’를 줬기 때문에,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더욱더 대담하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폭발할 것 같아 걱정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여성들이 희생될 것 같은 불안감이 커요.”
- ‘거제 교제사망 사건’ 피해자는 총 11차례 신고를 했다고 하는데요. 위험 신호를 경찰이 보다 적극 해석해 대처했더라면 안타까운 죽음을 피할 수도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교제폭력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특정 경험이 있는데, 목졸림이에요. 경찰이 조사할 때 관련 문항을 (피해자 보호 여부 판단 지표에) 추가할 필요가 있어요. 피해자한테 ‘남자친구가 저를 때려요’ 신고 전화가 오면 ‘지금 전화하신 분 혹시 목 졸린 적 있으세요?’ 현장에서 이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목조름이 살인 직전에 나타나는 가해자의 행동이거든요. 이건 다른 나라에는 ‘비치명적 목조르기’라고 처벌할 법률이 다 있어요. 실제로 지난 4월 ‘거제 살인 사건’ 등에서도 피해자들은 목졸림을 경험했어요. 더 큰 문제는 피해자가 주변인들의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는 점이에요. 친구들이나 가족이 피해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계속 피해자한테 ‘그런 사람 왜 만나냐, 너도 똑같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가해자가 좋아서 만나고 있는 게 아닌 거죠. 자신이 최대한 다치지 않으면서 안전하게 빠져나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건데 이 관계(통제)를 깊숙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답답해해요. 그래서 사망에 이른 피해자 사건을 접할 때면 생전 죽음의 공포에도 시달렸겠지만 참 외로웠겠다 싶어서 가슴 아파요.”
-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요.
“이 질문 들을 때 제일 난감해요. 그래도 당장은 경찰에 신고하고 숨어 있는 수밖에 없어요. 거주지도 옮기고 해야죠. 그리고 여성의전화 같은 전문기관에 꼭 찾아가셔야 해요. 혼자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법률 자문도 받아야 해요. 안타깝지만 지금은 피해자가 적극적이어야 해요. 무엇보다 고립돼 있으면 위험해요. 피해자 대부분 거의 자기 집에서 살해당했어요.”
- 현재 교제폭력 입법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존 가정폭력처벌법을 개정해 교제폭력 사건에 적용하는 방안, 아예 교제폭력만 다루는 별도의 특례법을 제정하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연구관님은 새로운 법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법을 보완하자는 입장이신 것 같은데요.
“해외 입법례를 보더라도 교제 관계에 관한 특별법이나 별도법을 만든 국가는 없어요. 우리도 기존 법을 손질해서 친밀한 관계의 폭력, 교제 관계에 있는 어떤 자를 포함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이 형편없으니 이참에 이 법을 다 전면 개정하자는 겁니다. 이 법에 처벌 불원과 상담 조건부 기소 유예 등 독소조항이 있기 때문에 이런 독소조항을 걷어내 제대로 된 법을 만들고, 범위를 넓혀 교제폭력에도 적용할 수 있게 바꿔야겠죠. 무엇보다 여성이 무슨 범죄를 겪을 때마다 별도 법을 만들 거냐고요? 사실 가정폭력처벌법, 스토킹법 등이 별도법으로 나열돼 있는 것도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사회가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에요.”
- 관련 법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조항은요.
“우선 피해자가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하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 적용을 폐지해야 되고요. 그다음으론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에 상담 조건부 기소유예 조항이 있어요. 이 조항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적용해야 합니다. ‘흉기 휘두른 경우엔 안 된다’ 등이 들어가야죠. 여기에 친밀한 관계에서의 ‘통제 행위’를 범죄화하는 조항을 마련해야 한다는 겁니다. 영국·호주 등에서 이미 통제 행위에 대해 처벌하고 있고,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법률 시행을 앞두고 있어요. 또한 피해자를 지키려면 가해자에게 GPS 추적 장치 부착을 명령하는 제도를 운영해야 합니다.”
-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가 존폐 기로에 있는 만큼 교제폭력 관련 피해자 보호 등 실효성 있는 정책을 마련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 사안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부처는 여가부 아닌가요? 젠더 폭력에 대해서 대안을 가지고 있는 부처는 우리밖에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렇게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는 부처를 흔들려고 했던 ‘대통령이 나쁘다’는 메시지를 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니 답답합니다.”
- 국가는 왜 피해자 보호에 실패할까요.
“여성 의원들이 너무 적기 때문이죠. 국회의원이 300명이라고 한다면, 그 절반은 돼야죠. 이번 22대 국회에 가장 많이 들어왔다고(지역구·비례대표 60명) 하더라고요. 지역구 당선인만 따져보면 전체 당선인(254명) 중 여성은 36명(14.17%)에 그쳐요. 지금 의원회관에 150명의 여성 의원이 있다면 이렇게 관련법이 통과 안 될 수가 없어요.”
- 앞으로 뭘 해야 할까요.
“여가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대통령이 선출된 사회에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에요. 그러니 1차적으로는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면서 현실을 똑바로 볼 필요가 있어요. 개인으론 부족하니 여성들 간 연대해야죠. 그리고 여성주의를 옹호하는 남성들과도. 10대 20대 젊은 여성들이 교제폭력으로 희생되는 것은 기성세대의 잘못이잖아요. 진즉에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을 엄단했다면 없었을 일입니다.”
이명희 논설위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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