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아르테미스
튀르키예 셀축에는 고대 도시인 에페소스(Ephesos)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익숙한 ‘에페소’라고 알려진 이 도시는 3000년 전부터 발전한 에게해 문명을 알려준다. 로마제국의 문화권 안에 든 이 고대 도시는 제정일치를 관장하는 포로(foro)와 신전, 셀수스 도서관과 광장, 그리고 2만5000명을 수용하는 대형 극장으로 당시 번성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고대 도시를 약간 벗어나 현 도심과 가까운 곳에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터가 있는데, 지금은 하나의 기둥만이 남아 있다. 이 신전에서 기리는 아르테미스 여신은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아르테미스라 불리고, 로마 문화권에서는 디아나(Diana)로 불린다. 이 도시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여신의 상(像)은 하반신에는 가축을, 상반신에는 많은 유방을 달고 있다. 이 여신은 사냥과 달의 여신이라 알려졌지만 에페소스에서는, 그리고 로마에서는 다산과 풍요의 여신으로 섬겼다.
경제와 문명이 발달한 고대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이 더 잘 살 수 있게 다산과 풍요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에게 간구하였다. 그리고 이 여신의 예배와 연결된 신전 창녀와 관계를 맺는 신전 매춘은 욕구의 해결이 아니라, 자신에게 올 다산과 풍요의 징표로 확신하였다. 이러한 신앙 행위의 결과로 모인 재화와 정성을 다시 여신에게 바치고, 여신에 대한 종교가 번성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와 문명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흔적을 보면서, 어쩌면 인간 존재의 저 깊숙이 새겨진 본성을 생각해 본다. ‘다산과 풍요라는 번창을 통해 지금의 자신이 더 잘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 번창하리라는 인간의 본성은 통치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이로 인해 신화가 알려주는 수많은 전쟁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아르테미스의 흔적이 수없이 남아 있다. 다산과 풍요를 위한 욕구는 수많은 종교에서 노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추구되고 있다. 또 이러한 욕구는 욕망과 결합되어 (유사)성행위를 하는 장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늘날에도 아르테미스에 대한 숭배는 지속된다. 하지만 아르테미스 숭배에서 아이러니한 것은 다산의 가치는 사라지고, 자신을 위한 번창의 가치만이 남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의 자신이 더 잘 살게 되는’ 욕망은 더 이상 다산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역사는 알려준다. 다산과 번창, 그리고 지배와 통치를 위한 전쟁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지만 이는 아주 오래된 인간 정신의 발아점에 불과하다. 아르테미스 신전이 기둥 하나의 흔적만 남긴 것처럼, 다산과 번창의 가치는 땅 아래에 묻혀 있다. 세기를 통해 진보한 인간의 정신은 ‘지금 자신이 더 잘 살게 되는’ 욕망이 투사하는 다산과 번창을 넘어 보다 인간적이고도 사라지지 않을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세기를 통해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다산과 번창을 추구하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다산과 번창에 관심을 지니게 되었고, 이러한 정신이 공생하는 법 질서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자신의 다산과 번창에 대비되는 다른 이들의 가난과 비참에 연대하는 문화를 건설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지속되는 것은 다산과 번영이 아닌 공생과 연대라는 것을 알려준다.
오늘날 아르테미스 숭배라고 여겨지는 우리의 문화는 한계를 모르는 인간의 욕심을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돈과 성과 권력이 신으로 여겨지는 이 세상은 새로운 아르테미스 숭배를 부추긴다. 영원하지 않을 시대의 흐름을 좇으라고 세상은 권유하는데, 이 사라질 가치를 넘어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하지만 이는 인간 정신이 지금도 여전히 지속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오늘날의 아르테미스를 숭배하지 않고, 인간 정신의 가치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 우리 사회가 폐허가 되지 않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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